˝석읍리 주민은 친형제 처럼 정답고 평화롭게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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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작성일20-05-19 19:39본문
↑↑ 석읍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임진왜란 때 황현 장군이 있었다. 황 장군은 7년간 이어지는 전쟁에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고 훗날 정3품 당상관까지 올랐다. 황 장군이 벼슬살이를 마치고 정착한 곳이 양남면 석읍리다. 황 장군이 자리를 잡은 마을에는 '목넘이 고개'라는 고개가 있어 큰 고개의 순 우리말인 '한티'라고 불렀다. 한자어로 표현하면 대현(大峴)이다.
지금도 외남로를 따라 석읍리로 다가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넓은 들판이 한티마을이다.
↑↑ 경영지원실 ICT부의 마을 봉사활동.
석읍리는 조선 중기 백석촌이라는 선비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에서 곧바로 드러나듯이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돌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돌골'이라고 부르다가 자연스럽게 '석읍'이라고 부르게 됐다.
석읍리는 대현, 석읍, 두뭇골 등 3개 자연마을로 이뤄졌으며 현재 81가구에 134명이 살아가고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석읍리에는 108가구에 약 700여명이 살았다고 하니 작은 마을은 아니었다. 당시 1가구에 대가족이 모여 살아 그 정도의 인구는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젊은이들은 돈벌이를 위해 대도시로 나가버렸다. 현재 석읍리에는 대부분 70대 이상의 고령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 중 70% 이상이 여성이다.
↑↑ 석읍리의 최고령자 최순출 할머니가 큰며느리와 함께 마늘밭을 메고 있다.
석읍리의 두뭇골은 재미있는 사연을 가지고 있다. 옛날 이 마을 주민들이 어떤 연유였는지는 몰라도 지방 관리에게 큰 미움을 사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마을 보다 세금을 두 몫이나 더 냈다고 해서 '두뭇(두몫)골'이라고 불렀다.
석읍리에는 인근 기구리, 석촌리, 효동리 등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석읍초등학교는 양남에서 제법 큰 초등학교였으나 역시 젊은 인구가 줄어들면서 오래 전에 폐교했다. 지금은 경북대학교병원 연수원으로 사용하다가 개인이 임대해 캠핑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말이면 운동장에 마련된 텐트를 임대하기 위해서는 오래 전에 예약을 해야 할 만큼 인기가 높은 곳이다.
↑↑ 석읍리 김진열 이장이 마을 어르신들에게 재난지원급 수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석읍리에는 1970년대까지 한지를 생산하는 지통이 4개나 있었다. 지금은 한지의 수요가 줄어들어 모두 없어졌지만 경주 인근의 도시에서는 석읍리에서 생산되는 한지가 품질이 가장 우수해서 많이 팔렸고 그 당시에는 석읍리의 경제활동을 대표하는 생산품이 됐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초겨울에 닥나무 껍질을 벗겨 한지를 만들던 지통은 대현에 1곳, 석읍에 2곳, 두뭇골에 1곳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산되는 한지는 기계식 대량생산에 밀려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석읍리의 최고령자는 올해 93세의 최순출 할머니다. 키는 작지만 아직도 이 마을에서 농사일을 가장 많이 하는 부지런한 어른이라 소문이 나 있다. 최 할머니는 "주말이면 울산의 큰 아들이 농사지으러 오지만 아직 일이 서툴러서 비료 뿌리는 일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며 "평생을 논밭에서 살았으니 죽을 때까지 몸을 움직일 생각"이라고 말했다.
↑↑ 석읍리의 한적한 골목길. 시골마을의 정취가 흠씬 느껴진다.
또 "어릴 때 시집와 3남 3녀를 농사지어서 키웠으니 석읍리는 내 삶의 전부며 농토는 삶을 지탱하게 해 준 핏줄"이라고 덧붙였다.
최 할머니와 함께 마늘밭을 일구던 큰며느리 김명자씨는 "어머니는 아직도 주무시기 전에 일정분량의 독서를 하실 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하신 분"이라며 "한문으로 된 책을 읽을 정도로 학식도 뛰어나다"고 자랑했다.
석읍리 김진열 이장은 젊은 시절 서울의 유수한 호텔 일식당에서 일하던 세프 출신이다. 석읍리로 귀농한 김 이장은 월성원전의 자매부서인 경영지원실 ICT부와 교류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다른 마을과 다른 특별한 지원을 협의하고 있다.
김 이장은 "석읍리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전국에 알리고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인터넷과 SNS를 통한 홍보가 가장 효과적"이라며 "지금은 협의 초기단계지만 자매부서에 인터넷 교육과 컴퓨터 지원을 부탁했으며 상당히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 이장은 "월성원전이 자매마을에 현물지원을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되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지원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덧붙였다.
↑↑ 지금은 폐교가 된 석읍초등학교.
경영지원실 ICT부의 길상섭 과장은 "이장을 중심으로 한 석읍리 마을 어르신들은 마치 친부모님, 형님처럼 정답다"며 "특히 원자력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모시듯이 정성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대현마을 회관 앞에서 만난 한 주민은 "양남에서는 가장 평화로운 마을이 우리 석읍리일 것"이라며 "마을 주민들은 친형제처럼 정답고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밝혔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임진왜란 때 황현 장군이 있었다. 황 장군은 7년간 이어지는 전쟁에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고 훗날 정3품 당상관까지 올랐다. 황 장군이 벼슬살이를 마치고 정착한 곳이 양남면 석읍리다. 황 장군이 자리를 잡은 마을에는 '목넘이 고개'라는 고개가 있어 큰 고개의 순 우리말인 '한티'라고 불렀다. 한자어로 표현하면 대현(大峴)이다.
지금도 외남로를 따라 석읍리로 다가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넓은 들판이 한티마을이다.
↑↑ 경영지원실 ICT부의 마을 봉사활동.
석읍리는 조선 중기 백석촌이라는 선비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에서 곧바로 드러나듯이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돌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돌골'이라고 부르다가 자연스럽게 '석읍'이라고 부르게 됐다.
석읍리는 대현, 석읍, 두뭇골 등 3개 자연마을로 이뤄졌으며 현재 81가구에 134명이 살아가고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석읍리에는 108가구에 약 700여명이 살았다고 하니 작은 마을은 아니었다. 당시 1가구에 대가족이 모여 살아 그 정도의 인구는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젊은이들은 돈벌이를 위해 대도시로 나가버렸다. 현재 석읍리에는 대부분 70대 이상의 고령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 중 70% 이상이 여성이다.
↑↑ 석읍리의 최고령자 최순출 할머니가 큰며느리와 함께 마늘밭을 메고 있다.
석읍리의 두뭇골은 재미있는 사연을 가지고 있다. 옛날 이 마을 주민들이 어떤 연유였는지는 몰라도 지방 관리에게 큰 미움을 사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마을 보다 세금을 두 몫이나 더 냈다고 해서 '두뭇(두몫)골'이라고 불렀다.
석읍리에는 인근 기구리, 석촌리, 효동리 등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석읍초등학교는 양남에서 제법 큰 초등학교였으나 역시 젊은 인구가 줄어들면서 오래 전에 폐교했다. 지금은 경북대학교병원 연수원으로 사용하다가 개인이 임대해 캠핑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말이면 운동장에 마련된 텐트를 임대하기 위해서는 오래 전에 예약을 해야 할 만큼 인기가 높은 곳이다.
↑↑ 석읍리 김진열 이장이 마을 어르신들에게 재난지원급 수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석읍리에는 1970년대까지 한지를 생산하는 지통이 4개나 있었다. 지금은 한지의 수요가 줄어들어 모두 없어졌지만 경주 인근의 도시에서는 석읍리에서 생산되는 한지가 품질이 가장 우수해서 많이 팔렸고 그 당시에는 석읍리의 경제활동을 대표하는 생산품이 됐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초겨울에 닥나무 껍질을 벗겨 한지를 만들던 지통은 대현에 1곳, 석읍에 2곳, 두뭇골에 1곳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산되는 한지는 기계식 대량생산에 밀려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석읍리의 최고령자는 올해 93세의 최순출 할머니다. 키는 작지만 아직도 이 마을에서 농사일을 가장 많이 하는 부지런한 어른이라 소문이 나 있다. 최 할머니는 "주말이면 울산의 큰 아들이 농사지으러 오지만 아직 일이 서툴러서 비료 뿌리는 일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며 "평생을 논밭에서 살았으니 죽을 때까지 몸을 움직일 생각"이라고 말했다.
↑↑ 석읍리의 한적한 골목길. 시골마을의 정취가 흠씬 느껴진다.
또 "어릴 때 시집와 3남 3녀를 농사지어서 키웠으니 석읍리는 내 삶의 전부며 농토는 삶을 지탱하게 해 준 핏줄"이라고 덧붙였다.
최 할머니와 함께 마늘밭을 일구던 큰며느리 김명자씨는 "어머니는 아직도 주무시기 전에 일정분량의 독서를 하실 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하신 분"이라며 "한문으로 된 책을 읽을 정도로 학식도 뛰어나다"고 자랑했다.
석읍리 김진열 이장은 젊은 시절 서울의 유수한 호텔 일식당에서 일하던 세프 출신이다. 석읍리로 귀농한 김 이장은 월성원전의 자매부서인 경영지원실 ICT부와 교류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다른 마을과 다른 특별한 지원을 협의하고 있다.
김 이장은 "석읍리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전국에 알리고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인터넷과 SNS를 통한 홍보가 가장 효과적"이라며 "지금은 협의 초기단계지만 자매부서에 인터넷 교육과 컴퓨터 지원을 부탁했으며 상당히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 이장은 "월성원전이 자매마을에 현물지원을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되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지원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덧붙였다.
↑↑ 지금은 폐교가 된 석읍초등학교.
경영지원실 ICT부의 길상섭 과장은 "이장을 중심으로 한 석읍리 마을 어르신들은 마치 친부모님, 형님처럼 정답다"며 "특히 원자력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모시듯이 정성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대현마을 회관 앞에서 만난 한 주민은 "양남에서는 가장 평화로운 마을이 우리 석읍리일 것"이라며 "마을 주민들은 친형제처럼 정답고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밝혔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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