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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21. 통일이념과 국호를 신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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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5-17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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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천재지변] 기림이사금 때에 신라에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자주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서기 302년(기림왕 5)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가뭄이 심하게 들어 농사는커녕 산천초목은 모두 타들어 가고 사람들은 마실 물조차 귀하여 물이 있는 곳이라면 원근을 막론하고 물을 찾기에 골몰하였다. 서기 304년(기림 7) 8월에는 큰 지진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는데, 지진으로 갈라진 땅에서 샘물이 솟구쳐 홍수가되어 피해를 입었는가 하면, 9월에는 계림(서울)에도 지진이 일어나서 민가가 상당 수 무너지고 사망자도 많이 발생할 정도로 심한 지진이 반복하여 발생하므로 백성들은 하늘의 재앙에 겁을 먹은 채 불안하고 고통스런 밤낮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석기림왕 치세 13년 동안에는 여니 때처럼 백제가 신라를 침공했거나 괴롭혔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통일이념] 한편, 307년(기림 10) 석기림왕은 나라이름을 다시 '신라(新羅)'라고 하였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신라는 내부의 단결을 위하여 건국초기부터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罔羅四方)이라 하여 주변 강국을 통합한다는 야심찬 외교적 노선으로 국력의 방향을 미리 일치시켰다. 그에 반하여 국력이 분열된 가야, 백제, 고구려 모두 차례대로 멸망하였다. 국론 통합의 당연한 결과 신라는 역사의 승자로 남았다.

                     

  여기에서 '신라의 통일이념'이 실제로 이뤄지기까지의 흐름을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잠시 살펴보자면 '德業日新 罔羅四方'이란 이 문구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공주 덕만(선덕여왕)과 미실이 화랑의 대장 '풍월주' 자리에 자신의 사람을 앉히기 위해 세(勢)를 겨루는 중에 문노공이 과제로 낸 '신라'라는 국호에 담긴 의미를 알아 오라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누가 신라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선 굵은 시퀀스(sequence : 서열)가 되어 선덕여왕의 품격을 다른 리더로서의 자질을 보여주게 된다. 한번도 왕을 꿈꾸지도, 백성을 안정시킬 삼국통일을 꿈꾸지 않으면서 오로지 권력만을 꿈꾸었던 미실과, 약소국인 신라의 미래를 생각하며 백성들의 안정과 나라 발전을 위한 삼국통일을 꿈꾸는 덕만공주(선덕여왕)의 대비는 무척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결국 진흥왕이 시작하고 선덕여왕이 가시화시킨 삼국통일은 그녀가 조카손자인 문무대왕 때 이루어 지지만, 가장 약한 나라였던 신라가 그 이름값 대로 삼국을 통일하게 된 데는 그 여자의 앞날을 내다보며 큰 꿈을 가지는 당당한 목표의식과 주변국과 적절한 외교를 밀당할 줄 아는 지혜, 김유신과 김춘추를 키웠던 인재를 알아 보는 능력이 삼국통일을 만들어 낸 것으로 드라마는 표현하고 있다.

                     

  [국호를 신라로] '삼국사기'의 '지리지(地理志)'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이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에는 나라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고 하였는데 '사라(斯羅)'나 '사로(斯盧)', '신라(新羅)'라고도 했으며, 석탈해왕 때인 65년(탈해 9)에 시림(始林)에서 닭소리가 들리는 괴이한 일이 있어서 '계림(鷄林)'으로 바꾸었으나 석기림왕 10년에 다시 신라(新羅)라는 이름으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의미이고, '라(羅)'는 사방의 백성들을 모두 망라한다는 뜻이며, 석기림왕 때부터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후에도 '사로' '사라' 등의 방언이 많이 혼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증왕(智證王)이나 법흥왕(法興王) 때에 이르러 국호를 '신라'로 단일화 시켜 통일된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서기310년(경오년 왕13년) 5월에 왕이 병환으로 오래 누워 있으므로 내외 감옥의 죄수들을 석방해 주었다. 석기림왕은 재위 13년 6월에 붕어하시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각간(角刊) 석우로(昔于老)의 아들 석흘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장지는 미상이다.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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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