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국 장군 후손들이 사는 박씨 집성촌, 친족들의 화합으로 평화로운 시골 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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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작성일20-05-14 20:29본문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임진왜란 때 연전전투에 나아가 장렬하게 전사한 박인국 장군은 진주 남사가 고향이었다.
아버지의 주검을 수습한 박 장군의 아들 박영남은 유해를 진주로 운구하려 했지만 길이 너무 멀어 포기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마을의 북쪽 산에 묘를 쓰고 시묘살이를 위해 마을에 정착했다.
그 마을이 지금의 기구리다.
↑↑ 기구리 주민들이 마을 청소를 마치고 모여 앉아 정담을 나누고 있다.
기구리의 옛 이름은 텃두들이며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텃두들이라고 부른다.
텃두들의 한자식 표기가 기구다.
이 마을에는 73 가구에 130여명이 살고 있다.
주민들 가운데 80%가 70대 이상으로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80대 초반까지 농사일을 하고 있으니 고령 농촌사회의 전형이다.
기구리는 과거 박인국 장군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 기구리의 최고령자 김무수(왼쪽) 할머니와 김분옥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젊은 시절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한때는 박씨 문중이 약 100 가구가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돈벌이 하러 대처로 나가고 50여 가구만 남았다. 그래도 이 마을의 약 70% 정도가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 마을 박왕근 이장은 “아무래도 박씨 문중의 인척들이 모여 살아가는 마을이다 보니 모두 친척이라는 생각에 어느 마을보다 화합이 잘 되는 편”이라며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할 때 별 다른 물의가 없이 쉽게 결정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사를 짓다보니 이렇다 할 소득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남아 있다.
물론 우리나라 대부분 농촌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기구리에는 젊은이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아 소득이 높은 가구가 없는 실정이다.
↑↑ 기구리 박왕근 이장(가운데)과 월성원전 제1발전소 계측제어팀 직원들이 만나 자매마을 주민의 근황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박 이장은 “비록 가난하지만 오랫동안 우리 전통의 시골 인심이 잘 보존돼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며 “마을의 어르신들을 잘 모시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 이장의 임무”라고 말했다.
기구리의 최고령자는 김무수, 김분옥 할머니로 두 사람은 올해 93세다.
기구에서 태어나 동네혼사를 치렀고 젊은 시절 돈벌이 하러 대구로 떠난 남편을 따라 갔다가 고향이 좋아 다시 돌아와 ‘대구 할매’라는 택호가 붙은 김무수 할머니는 아직도 정정하게 동네를 활보하고 다닌다.
김 할머니는 “젊어서 대구에서 생활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 외로웠지만 고향에 돌아오니 모두 식구처럼 편안했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말했다.
김분옥 할머니는 인근 울산 강동동 대안리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젊은 처녀들의 위안부 징발을 피해 17살에 기구리 총각과 결혼한 후 줄곧 이 마을에서 살았다.
김 할머니는 “처음 이 마을에 시집을 오니 너무 가난해서 칡넝쿨을 먹고 살 정도로 고생스러웠지만 요즘은 밥을 실컷 먹을 수 있어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다.
↑↑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의사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기구리 마을 입구에 마련된 임란공신창의비.
기구리는 월성원자력본부 제1발전소 계측제어팀의 자매마을이다.
계측제어팀에서 지원하는 현금은 주로 농기구를 구입하는 데 쓰인다.
박 이장은 “농사일을 하는 분들이 연로하셔서 힘을 덜 들이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현대화된 농기구를 구입하는 데 월성원전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된다”며 “남는 지원금은 1년에 한 번씩 어르신들이 함께 여행을 하는데 쓰인다”고 밝혔다.
계측제어팀 설남환 차장은 “지구환경과 국가경제, 그리고 지역경제를 위해 원자력은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자매마을과 잘 교류하면서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기구리의 한적한 골목. 키낮은 꽃과 대문을 타고 올라간 장미가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한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날 기구리 마을은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마을회관 앞에 주민들이 모두 모여 무성하게 자란 풀을 깎고 마을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코로나19로 마을회관이 문을 닫아 큰 나무 아래 앉아 일을 마치고 국수도 삶아 나눠 먹고 있었다.
한 마을 주민은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서로 다투지 않고, 소박하지만 맛있는 음식도 나눠 먹으며 화목하게 살아가니 이 보다 더 평화로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기구리에는 최근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농촌에 인구가 감소하는 것과는 상반된 현상이다. 바로 인근 도시에서 한적하고 평화로운 이 마을로 이주해서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인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인근 울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이제는 기구리의 새로운 주민으로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아버지의 주검을 수습한 박 장군의 아들 박영남은 유해를 진주로 운구하려 했지만 길이 너무 멀어 포기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마을의 북쪽 산에 묘를 쓰고 시묘살이를 위해 마을에 정착했다.
그 마을이 지금의 기구리다.
↑↑ 기구리 주민들이 마을 청소를 마치고 모여 앉아 정담을 나누고 있다.
기구리의 옛 이름은 텃두들이며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텃두들이라고 부른다.
텃두들의 한자식 표기가 기구다.
이 마을에는 73 가구에 130여명이 살고 있다.
주민들 가운데 80%가 70대 이상으로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80대 초반까지 농사일을 하고 있으니 고령 농촌사회의 전형이다.
기구리는 과거 박인국 장군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 기구리의 최고령자 김무수(왼쪽) 할머니와 김분옥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젊은 시절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한때는 박씨 문중이 약 100 가구가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돈벌이 하러 대처로 나가고 50여 가구만 남았다. 그래도 이 마을의 약 70% 정도가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 마을 박왕근 이장은 “아무래도 박씨 문중의 인척들이 모여 살아가는 마을이다 보니 모두 친척이라는 생각에 어느 마을보다 화합이 잘 되는 편”이라며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할 때 별 다른 물의가 없이 쉽게 결정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사를 짓다보니 이렇다 할 소득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남아 있다.
물론 우리나라 대부분 농촌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기구리에는 젊은이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아 소득이 높은 가구가 없는 실정이다.
↑↑ 기구리 박왕근 이장(가운데)과 월성원전 제1발전소 계측제어팀 직원들이 만나 자매마을 주민의 근황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박 이장은 “비록 가난하지만 오랫동안 우리 전통의 시골 인심이 잘 보존돼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며 “마을의 어르신들을 잘 모시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 이장의 임무”라고 말했다.
기구리의 최고령자는 김무수, 김분옥 할머니로 두 사람은 올해 93세다.
기구에서 태어나 동네혼사를 치렀고 젊은 시절 돈벌이 하러 대구로 떠난 남편을 따라 갔다가 고향이 좋아 다시 돌아와 ‘대구 할매’라는 택호가 붙은 김무수 할머니는 아직도 정정하게 동네를 활보하고 다닌다.
김 할머니는 “젊어서 대구에서 생활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 외로웠지만 고향에 돌아오니 모두 식구처럼 편안했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말했다.
김분옥 할머니는 인근 울산 강동동 대안리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젊은 처녀들의 위안부 징발을 피해 17살에 기구리 총각과 결혼한 후 줄곧 이 마을에서 살았다.
김 할머니는 “처음 이 마을에 시집을 오니 너무 가난해서 칡넝쿨을 먹고 살 정도로 고생스러웠지만 요즘은 밥을 실컷 먹을 수 있어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다.
↑↑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의사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기구리 마을 입구에 마련된 임란공신창의비.
기구리는 월성원자력본부 제1발전소 계측제어팀의 자매마을이다.
계측제어팀에서 지원하는 현금은 주로 농기구를 구입하는 데 쓰인다.
박 이장은 “농사일을 하는 분들이 연로하셔서 힘을 덜 들이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현대화된 농기구를 구입하는 데 월성원전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된다”며 “남는 지원금은 1년에 한 번씩 어르신들이 함께 여행을 하는데 쓰인다”고 밝혔다.
계측제어팀 설남환 차장은 “지구환경과 국가경제, 그리고 지역경제를 위해 원자력은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자매마을과 잘 교류하면서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기구리의 한적한 골목. 키낮은 꽃과 대문을 타고 올라간 장미가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한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날 기구리 마을은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마을회관 앞에 주민들이 모두 모여 무성하게 자란 풀을 깎고 마을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코로나19로 마을회관이 문을 닫아 큰 나무 아래 앉아 일을 마치고 국수도 삶아 나눠 먹고 있었다.
한 마을 주민은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서로 다투지 않고, 소박하지만 맛있는 음식도 나눠 먹으며 화목하게 살아가니 이 보다 더 평화로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기구리에는 최근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농촌에 인구가 감소하는 것과는 상반된 현상이다. 바로 인근 도시에서 한적하고 평화로운 이 마을로 이주해서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인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인근 울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이제는 기구리의 새로운 주민으로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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