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18. 석유례왕의 충직한 참모와 화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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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4-19 17:15본문
↑↑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성은 석(昔), 이름[諱]는 유례(儒禮)이며,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유례이질금(儒禮尼叱今)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리지왕(世里智王)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제11대 석조분이사금(昔助賁尼師今, 재위 230∼247)의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나음갈문왕(奈音葛文王)의 딸 박씨(朴氏)의 소생이다. '삼국유사''왕력(王曆)'편에는 어머니가'○소부인(○召夫人) 박씨'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첫 글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박씨 부인이 밤길을 다가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가 임신을 했으며, 유례왕(儒禮王)을 낳던 날 저녁에 이상한 향기가 산실을 가득 채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유례왕에게는 제13대 김미추 이사금(金味鄒 尼師今, 재위 262~284)의 왕비가 된 여동생 광명부인(光明夫人) 석씨(昔氏)와 제16대 흘해왕(訖解王, 재위 310~356)의 어머니인 명원부인(命元夫人) 석씨(昔氏), 제15대 기림왕(基臨왕, 재위 298~310)의 아버지인 걸숙(乞淑) 등의 형제와 자매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석조분왕은 247년(조분 18)에 사망했으나 맏아들인 석유례가 왕위를 잇지 못하고, 숙부인 석첨해이사금(昔沾解尼師今, 재위 247∼261)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석첨해왕이 죽은 뒤에는 김씨(金氏)인 미추이사금이 왕위를 계승했고, 석유례는 김미추왕이 284년(미추 23) 죽은 뒤에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비나 자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석유례왕의 치정일지' 왕위에 오른 석유례왕은 서기285년(유례 2) 일찍 시조사당에 배례를 올렸다. 이찬 홍권(弘權)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임명해 중요한 국정을 맡겼다.
서기290년(경술년 왕7년) 5월 끝일 줄 모르는 큰비가 엄청나게 많이 내린 끝에 홍수가 저서 하천이 범람하여 논밭이 유실되고 민가도 전파 또는 반파의 피해가 많았으며, 튼튼하게 쌓았다는 성도 여러 곳이 완파되거나 금이 가는 등의 재난을 당했다. 그리고 291년(유례 8) 김미추이사금의 동생이자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아버지인 김말구(金末仇 처는 휴례부인)를 이벌찬으로 삼았는데, 그는 충직하고 지략이 많아 석유례왕은 그를 자주 찾으시어 긴요한 정사는 모두 말구공(公)과 상의 후 시행하였다고 한다.
※말구는 16대 내물왕께서 즉위 후 충정대왕(忠貞大王)에 추존(追尊) 되었다. 286년(유례 3)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심한 가뭄이 들어 들판의 농작물은 말라 죽어가고 깊은 우물의 물도 고갈되어 사람들은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원근을 가리지 않고 물 찾기에 동서남북을 헤매는 식수대란까지 겪게 되었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오랜 세월동안 변방을 침범하거나 약탈로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百濟)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해오므로 석유례왕은 많은 자문과 고민 끝에 이를 받아 들여 양국간에 불가침의 화해조약을 맺음으로 오랜 기간 대립해왔던 백제와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293년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의 호민 80여 가를 성 안으로 옮겼다. 292년(유례 9) 7월에는 가뭄과 황재(蝗災 : 누리'메뚜기과에 딸린 큰 해충'이나 메뚜기로 인한 농작물의 피해)가 들었다. 서기295년(을묘년 왕12년) 7월에 다사군(多沙郡)에서는 농민들이 추수한 기름진 쌀을 왕에게 진상했다. 한편, 290년(유례 7)에는 홍수로 월성(月城)이 무너져서 이를 보수하였다. 석유례왕은 298년(무오년 유례 15) 2월에 금성(서울)에 큰 안개가 끼어서 옆 사람도 분간할 수가 없었는데 5일만에야 날이 개었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신라 제11대 석조분이사금(昔助賁尼師今, 재위 230∼247)의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나음갈문왕(奈音葛文王)의 딸 박씨(朴氏)의 소생이다. '삼국유사''왕력(王曆)'편에는 어머니가'○소부인(○召夫人) 박씨'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첫 글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박씨 부인이 밤길을 다가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가 임신을 했으며, 유례왕(儒禮王)을 낳던 날 저녁에 이상한 향기가 산실을 가득 채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유례왕에게는 제13대 김미추 이사금(金味鄒 尼師今, 재위 262~284)의 왕비가 된 여동생 광명부인(光明夫人) 석씨(昔氏)와 제16대 흘해왕(訖解王, 재위 310~356)의 어머니인 명원부인(命元夫人) 석씨(昔氏), 제15대 기림왕(基臨왕, 재위 298~310)의 아버지인 걸숙(乞淑) 등의 형제와 자매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석조분왕은 247년(조분 18)에 사망했으나 맏아들인 석유례가 왕위를 잇지 못하고, 숙부인 석첨해이사금(昔沾解尼師今, 재위 247∼261)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석첨해왕이 죽은 뒤에는 김씨(金氏)인 미추이사금이 왕위를 계승했고, 석유례는 김미추왕이 284년(미추 23) 죽은 뒤에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비나 자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석유례왕의 치정일지' 왕위에 오른 석유례왕은 서기285년(유례 2) 일찍 시조사당에 배례를 올렸다. 이찬 홍권(弘權)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임명해 중요한 국정을 맡겼다.
서기290년(경술년 왕7년) 5월 끝일 줄 모르는 큰비가 엄청나게 많이 내린 끝에 홍수가 저서 하천이 범람하여 논밭이 유실되고 민가도 전파 또는 반파의 피해가 많았으며, 튼튼하게 쌓았다는 성도 여러 곳이 완파되거나 금이 가는 등의 재난을 당했다. 그리고 291년(유례 8) 김미추이사금의 동생이자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아버지인 김말구(金末仇 처는 휴례부인)를 이벌찬으로 삼았는데, 그는 충직하고 지략이 많아 석유례왕은 그를 자주 찾으시어 긴요한 정사는 모두 말구공(公)과 상의 후 시행하였다고 한다.
※말구는 16대 내물왕께서 즉위 후 충정대왕(忠貞大王)에 추존(追尊) 되었다. 286년(유례 3)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심한 가뭄이 들어 들판의 농작물은 말라 죽어가고 깊은 우물의 물도 고갈되어 사람들은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원근을 가리지 않고 물 찾기에 동서남북을 헤매는 식수대란까지 겪게 되었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오랜 세월동안 변방을 침범하거나 약탈로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百濟)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해오므로 석유례왕은 많은 자문과 고민 끝에 이를 받아 들여 양국간에 불가침의 화해조약을 맺음으로 오랜 기간 대립해왔던 백제와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293년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의 호민 80여 가를 성 안으로 옮겼다. 292년(유례 9) 7월에는 가뭄과 황재(蝗災 : 누리'메뚜기과에 딸린 큰 해충'이나 메뚜기로 인한 농작물의 피해)가 들었다. 서기295년(을묘년 왕12년) 7월에 다사군(多沙郡)에서는 농민들이 추수한 기름진 쌀을 왕에게 진상했다. 한편, 290년(유례 7)에는 홍수로 월성(月城)이 무너져서 이를 보수하였다. 석유례왕은 298년(무오년 유례 15) 2월에 금성(서울)에 큰 안개가 끼어서 옆 사람도 분간할 수가 없었는데 5일만에야 날이 개었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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