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아챠` 반인반신 팔부중상 경주 읍성에 새겨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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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재 작성일20-03-04 16:30본문
↑↑ 복원정비 사업이 진행 중인 사적 제96호 경주 읍성 모습. 사진제공=경주시
[경북신문=장성재기자] '긴나라'·'마후라가'·'아수라'·'건달바'·'야차'·'용' 등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부중상 부조'가 조선시대에 축조된 '경주 읍성'에서 발견돼 학계의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이 팔부중상 면석은 다른 나라 탑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고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창안된 독특한 부조상이라 더욱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문화재청과 경주시, 한국문화재재단은 지난달 경주읍성 복원정비 사업부지(5구간)내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조선시대에 축조된 성벽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사용된 팔부중상 면석 3매가 기단석으로 재사용됐음을 확인했다.
↑↑ 팔부중상이 부조된 탑재 3매 가운데 북쪽에 새겨진 ''긴나라·마후라가' 사진제공=경주시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 청중을 구성하는 다양한 무리 중 하나로,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를 일컫는 집합적 용어다. 천(天)·가루라(迦樓羅), 용(龍)·야차(夜叉), 건달바·아수라(阿修羅), 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伽) 등 하늘의 천신, 땅에 사는 지신과 축생, 물에 사는 수신, 그리고 인간도 신도 아닌 반인반신이나 귀신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 남쪽에 새겨진 '아수라·건달바' 사진제공=경주시
◇읍성 동벽의 치성 기단석으로 사용
‘팔부중상’ 이 부조된 탑재 3매는 읍성 5구간(경주읍성의 동문(향일문) 및 성벽의 북쪽구간으로 북벽으로 연결되는 구간)의 체성 벽에 덧대어 있는 치성의 가장 아래인 기단석으로 사용됐다.
읍성 5구간에서 치성은 현재 1곳만 확인되었는데, 최근까지 주택이 있었던 자리로 기초석과 기단석 정도만 남아있다. 치성을 올리기 위한 기초석의 범위는 동서 길이 11m, 남북 너비 11m이며, 치성 기단석의 범위는 길이 10m, 너비 8m 이다.
팔부중상이 부조된 면석 3매는 치성 기단의 북쪽과 동쪽 모서리를 연결해 놓여 있으며, 기단석에는 팔부중상의 면석 이외에도 탑 부재들과 건물 터의 주초석 등이 사용됐다.
현재 기초석의 침하로 팔부중상 면석들은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팔부중상의 부조 면이 위로 보며 놓여 있기 때문에 치성이 축조되었을 당시에는 그 위로 많은 석재들이 올려져있어 성벽 외부로 상이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동쪽에 새겨진 '야차·용' 사진제공=경주시
◇동·남·북면의 팔부중상만 확인
팔부중상 면석 3매에는 각 1매에 1쌍의 팔부중상이 부조돼 있다. 이번에 출토된 팔부중상은 탑의 서탑의 서쪽(천·가루라)에 사용되는 면을 제외한 북쪽(긴나라·마후라가)·남쪽(아수라·건달바)·동쪽(야차·용)에 사용하는 3면의 면석이 발견됐다.
면석 북쪽면의 길이는 148cm 너비 75cm이고, 남쪽면의 길이는 184cm 너비 75cm, 동쪽면의 길이 166cm 너비 75cm로 확인됐다.
↑↑ 경주 읍성에서 발견된 치성 기단석 세부 모습과 팔부중상(빨간 동그라미) 위치. 사진제공=경주시
◇9세기 중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 중에서 동일한 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경주지역에서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는 담엄사지 석탑재, 창림사지 석탑, 남산리사지 서탑, 숭복사지 동·서탑, 인왕동사지(傳 인용사지) 동서탑재, 사제사지 탑재 등이 있다.
그러나 조각 전체가 8세기대의 조각양상에 비해서 정교하지 못한 편이고, 천의 자락 날림이 부자연스럽고 손 모양도 변형된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중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련 전공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경주 읍성의 치성은 발굴조사를 통해서 체성과는 별도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며,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조선시대 세종(1418~1450년)연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복원정비 사업이 완료된 경주 읍성 구간 모습. 사진제공=경주시
사적 제 96호인 경주 읍성의 최초 기록은 '고려사' 병지 성보조에 현종 3년(1012년)에 성을 쌓았다는 내용과 동경잡기에 고려 우왕 무오년(1378년)에 석성으로 개축됐다는 기사가 있다.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한국문화재재단 박종섭 팀장은 “치성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때 팔부중상 석탑재가 성벽의 석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사상적 배경과 불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전했다.
장성재 blowpaper@naver.com
[경북신문=장성재기자] '긴나라'·'마후라가'·'아수라'·'건달바'·'야차'·'용' 등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부중상 부조'가 조선시대에 축조된 '경주 읍성'에서 발견돼 학계의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이 팔부중상 면석은 다른 나라 탑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고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창안된 독특한 부조상이라 더욱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문화재청과 경주시, 한국문화재재단은 지난달 경주읍성 복원정비 사업부지(5구간)내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조선시대에 축조된 성벽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사용된 팔부중상 면석 3매가 기단석으로 재사용됐음을 확인했다.
↑↑ 팔부중상이 부조된 탑재 3매 가운데 북쪽에 새겨진 ''긴나라·마후라가' 사진제공=경주시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 청중을 구성하는 다양한 무리 중 하나로,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를 일컫는 집합적 용어다. 천(天)·가루라(迦樓羅), 용(龍)·야차(夜叉), 건달바·아수라(阿修羅), 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伽) 등 하늘의 천신, 땅에 사는 지신과 축생, 물에 사는 수신, 그리고 인간도 신도 아닌 반인반신이나 귀신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 남쪽에 새겨진 '아수라·건달바' 사진제공=경주시
◇읍성 동벽의 치성 기단석으로 사용
‘팔부중상’ 이 부조된 탑재 3매는 읍성 5구간(경주읍성의 동문(향일문) 및 성벽의 북쪽구간으로 북벽으로 연결되는 구간)의 체성 벽에 덧대어 있는 치성의 가장 아래인 기단석으로 사용됐다.
읍성 5구간에서 치성은 현재 1곳만 확인되었는데, 최근까지 주택이 있었던 자리로 기초석과 기단석 정도만 남아있다. 치성을 올리기 위한 기초석의 범위는 동서 길이 11m, 남북 너비 11m이며, 치성 기단석의 범위는 길이 10m, 너비 8m 이다.
팔부중상이 부조된 면석 3매는 치성 기단의 북쪽과 동쪽 모서리를 연결해 놓여 있으며, 기단석에는 팔부중상의 면석 이외에도 탑 부재들과 건물 터의 주초석 등이 사용됐다.
현재 기초석의 침하로 팔부중상 면석들은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팔부중상의 부조 면이 위로 보며 놓여 있기 때문에 치성이 축조되었을 당시에는 그 위로 많은 석재들이 올려져있어 성벽 외부로 상이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동쪽에 새겨진 '야차·용' 사진제공=경주시
◇동·남·북면의 팔부중상만 확인
팔부중상 면석 3매에는 각 1매에 1쌍의 팔부중상이 부조돼 있다. 이번에 출토된 팔부중상은 탑의 서탑의 서쪽(천·가루라)에 사용되는 면을 제외한 북쪽(긴나라·마후라가)·남쪽(아수라·건달바)·동쪽(야차·용)에 사용하는 3면의 면석이 발견됐다.
면석 북쪽면의 길이는 148cm 너비 75cm이고, 남쪽면의 길이는 184cm 너비 75cm, 동쪽면의 길이 166cm 너비 75cm로 확인됐다.
↑↑ 경주 읍성에서 발견된 치성 기단석 세부 모습과 팔부중상(빨간 동그라미) 위치. 사진제공=경주시
◇9세기 중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 중에서 동일한 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경주지역에서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는 담엄사지 석탑재, 창림사지 석탑, 남산리사지 서탑, 숭복사지 동·서탑, 인왕동사지(傳 인용사지) 동서탑재, 사제사지 탑재 등이 있다.
그러나 조각 전체가 8세기대의 조각양상에 비해서 정교하지 못한 편이고, 천의 자락 날림이 부자연스럽고 손 모양도 변형된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중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련 전공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경주 읍성의 치성은 발굴조사를 통해서 체성과는 별도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며,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조선시대 세종(1418~1450년)연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복원정비 사업이 완료된 경주 읍성 구간 모습. 사진제공=경주시
사적 제 96호인 경주 읍성의 최초 기록은 '고려사' 병지 성보조에 현종 3년(1012년)에 성을 쌓았다는 내용과 동경잡기에 고려 우왕 무오년(1378년)에 석성으로 개축됐다는 기사가 있다.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한국문화재재단 박종섭 팀장은 “치성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때 팔부중상 석탑재가 성벽의 석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사상적 배경과 불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전했다.
장성재 blowpa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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