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지 문화칼럼] 뺨을 어루만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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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홍영지 작성일21-06-14 19:45본문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어주자 택배를 가져다준다. 발송인을 보니 25,6년 전에 가르쳤던 학생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스승의 날이구나 하고 알았다. 몇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반갑게 만났다. 지금은 의사며 박사학위까지 가졌다고 해 참 즐겁게 환담했다.
나는 그에게 크게 베푼 게 없다.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해서 음악적 교감이 있었고 학예전 때 합창부 지휘를 맡긴 게 전부다. 행동이 단정하고 성적도 전교에서 뛰어나 맘속으로 예뻐하긴 했지만 오히려 도움은 내가 받은 셈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40여년의 교직생활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어떤 선생이었을까. 돌아보니 부끄러운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내게 평생 잊지 못하는 은사님이 계신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다. 5학년 때 전학을 하여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질문을 하셨다. 척박한 땅에 자라는 나무와 거름기가 좋은 땅에서 자라는 나무와 어느 쪽이 뿌리가 더 많이 뻗겠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나를 지명하셨다. 나는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나무라고 답했고 선생님은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셨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뛰어 다녀야하고 부유한 사람은 여유가 있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비유해 말했다. 선생님은 나를 빤히 바라보시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이셨다. 선생님은 졸업 때까지 월사금 기성회비 심지어 여행비까지 학교에 드는 경비 일체를 면제해 주셨다. 그 때 집이 몹시 어려웠던 터라 큰 은혜가 되었다. 그 뒤 나도 교단에 서며 선생님의 은덕을 늘 가슴에 새겼다.
몇 년 전, 수업 중에 어느 학생의 어머니가 갑자기 들이닥쳐 강의 중이던 여교사의 뺨을 때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그 학부모로서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수업 중의 교사에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은 몰상식이라는 표현을 넘어서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나라 교사의 위상이 이렇게까지 추락하고 말았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났다.
↑↑ 수필가 홍영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약관의 나이에 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버스에서 내려 십여 리를 걸어가야 했다. 전기도 없었고 5,6학년 교실을 제외하곤 책걸상도 없었다. 마을은 드문드문 멀게는 이 골짝 저 꼴짝 이십여 리 까지 떨어져 대여섯 개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집성촌은 대개 배타적이며 예절과 관습에 보수적인 경향이 짙다.
그러나 교사들을 대하는 예우는 극진했다. 마을이나 유지들의 길사에는 반드시 교직원들을 초대했다. 갓 쓴 노인들도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음식을 먹어도 교직원들은 꼭 방에 모셔 따로 상을 차려주었다.
어쩌다 흥이 도도해 지면 자리를 걷고 어르신들은 두루마기 자락을 너풀거리며 너울너울 춤을 췄다. 동네 젊은이들은 그 자리에 낄 엄두도 못 냈지만 교사들은 손잡고 끌고나와 함께 어울리자고 했다. 나도 잡혀나가 어색해 몸을 움츠리면 동네어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은 그냥 젊은이들과는 다르네. 우리들 늙은이들과 함께해도 괜찮은 자리네.'
교사는 지식전달자로서의 사명만이 전부가 아니다. 교사는 배우는 이들의 스승이며 은사가 되기도 한다.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사람을 말하며 은사는 그 중에서도 자기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준 스승을 말한다. 시각과 청각장애자였던 헬렌 켈러 여사가 세계적 인물이 된 것은 앤 설리반이라는 스승을 만난 덕분이다.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은 나의 음감을 자주 칭찬해 주셨고 고교 음악 선생님께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작곡을 사사한 교수님은 보다 넓은 음악세계에 눈뜨게 해 주셨다. 나를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고마운 스승님들이시다. 누구든 자기 가슴에 새길만한 스승이나 은사를 한 분도 만나지 못한 학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존경도 없이 지식 전달의 직업인으로만 바라보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도 불행하다. 존경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배운다. 교단에 선 교사의 뺨을 때리는 어머니를 보며 그녀의 자식은 무엇을 배웠을까.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뺨을 어루만진다.
수필가 홍영지 kua348@naver.com
나는 그에게 크게 베푼 게 없다.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해서 음악적 교감이 있었고 학예전 때 합창부 지휘를 맡긴 게 전부다. 행동이 단정하고 성적도 전교에서 뛰어나 맘속으로 예뻐하긴 했지만 오히려 도움은 내가 받은 셈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40여년의 교직생활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어떤 선생이었을까. 돌아보니 부끄러운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내게 평생 잊지 못하는 은사님이 계신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다. 5학년 때 전학을 하여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질문을 하셨다. 척박한 땅에 자라는 나무와 거름기가 좋은 땅에서 자라는 나무와 어느 쪽이 뿌리가 더 많이 뻗겠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나를 지명하셨다. 나는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나무라고 답했고 선생님은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셨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뛰어 다녀야하고 부유한 사람은 여유가 있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비유해 말했다. 선생님은 나를 빤히 바라보시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이셨다. 선생님은 졸업 때까지 월사금 기성회비 심지어 여행비까지 학교에 드는 경비 일체를 면제해 주셨다. 그 때 집이 몹시 어려웠던 터라 큰 은혜가 되었다. 그 뒤 나도 교단에 서며 선생님의 은덕을 늘 가슴에 새겼다.
몇 년 전, 수업 중에 어느 학생의 어머니가 갑자기 들이닥쳐 강의 중이던 여교사의 뺨을 때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그 학부모로서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수업 중의 교사에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은 몰상식이라는 표현을 넘어서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나라 교사의 위상이 이렇게까지 추락하고 말았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났다.
↑↑ 수필가 홍영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약관의 나이에 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버스에서 내려 십여 리를 걸어가야 했다. 전기도 없었고 5,6학년 교실을 제외하곤 책걸상도 없었다. 마을은 드문드문 멀게는 이 골짝 저 꼴짝 이십여 리 까지 떨어져 대여섯 개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집성촌은 대개 배타적이며 예절과 관습에 보수적인 경향이 짙다.
그러나 교사들을 대하는 예우는 극진했다. 마을이나 유지들의 길사에는 반드시 교직원들을 초대했다. 갓 쓴 노인들도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음식을 먹어도 교직원들은 꼭 방에 모셔 따로 상을 차려주었다.
어쩌다 흥이 도도해 지면 자리를 걷고 어르신들은 두루마기 자락을 너풀거리며 너울너울 춤을 췄다. 동네 젊은이들은 그 자리에 낄 엄두도 못 냈지만 교사들은 손잡고 끌고나와 함께 어울리자고 했다. 나도 잡혀나가 어색해 몸을 움츠리면 동네어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은 그냥 젊은이들과는 다르네. 우리들 늙은이들과 함께해도 괜찮은 자리네.'
교사는 지식전달자로서의 사명만이 전부가 아니다. 교사는 배우는 이들의 스승이며 은사가 되기도 한다.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사람을 말하며 은사는 그 중에서도 자기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준 스승을 말한다. 시각과 청각장애자였던 헬렌 켈러 여사가 세계적 인물이 된 것은 앤 설리반이라는 스승을 만난 덕분이다.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은 나의 음감을 자주 칭찬해 주셨고 고교 음악 선생님께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작곡을 사사한 교수님은 보다 넓은 음악세계에 눈뜨게 해 주셨다. 나를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고마운 스승님들이시다. 누구든 자기 가슴에 새길만한 스승이나 은사를 한 분도 만나지 못한 학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존경도 없이 지식 전달의 직업인으로만 바라보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도 불행하다. 존경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배운다. 교단에 선 교사의 뺨을 때리는 어머니를 보며 그녀의 자식은 무엇을 배웠을까.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뺨을 어루만진다.
수필가 홍영지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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