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진 단편연재소설] 휴식의 서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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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유진 작성일19-11-13 19:30본문
↑↑ 소설가 서유진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야고보서2:8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하라는 슬로건은 비와 비람에 얼룩진 거리의 플래카드처럼 남루했다. 창의력 개발 개선 방안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교육 과제였지만 교육청에서 받은 연수라고 해야 창의적이지도 않았고, 맥락 없는 단어의 나열과 질문에 불과했다. 그는 동료들의 안일한 사고에 충격을 주고 싶었다. 새로움이 관건이었다. 창의적인 사고는 어디에서 오는가. 굳은살 박인 뇌신경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찔러 화한 자극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밤낮 책을 읽고 열심히 연구한다 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수많은 선행자 모두의 사고가 자신이 가진 세계의 지평선 너머로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며 자신을 '부지런'의 함정에 밀어 넣었다. 그렇다. 그는 너무 부지런해서 서너 시간의 수면 외에는 일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이다. 평소 그가 잠들기 전에 반듯이 누워 책을 읽는 것은 행여 잠을 이룰 수 있을까 해서다.
번쩍번쩍. 또 섬광이다! 빛이 춤춘다. 춤을 춘다. 자자, 자자, 잠 좀 자자. 오늘 할 일이 태산 같다. 그런데 강의도 강의지만 저 녀석을 어쩌지. 녀석의 아버지를 고발할까. 아니지, 술 마시고 엄마를 두들겨 패도 생활비를 대 준다잖아. 오늘 밤도 맨발로 도망쳐 나온 녀석이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리며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떨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일어나 잠옷을 벗고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단숨에 내달아 간다면 녀석의 집까지 십 분이면 족한 거리였다. 그는 캄캄한 새벽길을 달렸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개들이 달을 보고 짖었다. 지난주 새벽에 전화를 받고 갔을 때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맨발을 동동 굴리며 기다리던 녀석이 지금 막 자신을 향해 마주 달려올 듯하다. 밤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데 삼거리의 전봇대, 그 옆의 공중전화 부스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의 귀는 스산한 소리들의 기억을 재생시켰다. 공중전화 부스 쪽으로 이삼 미터 앞으로 다가갔을 때는 낄낄대는 바람소리, 컥컥거리는 녀석의 울음소리, 자신의 거친 숨소리, 모든 소리가 한데 어울려 하모니를 이루었다. 그는 비의로 가득 찬 소리의 삼중주를 들으며 하늘을 우러러봤는데.
"아! 아직도! 올라갈 때는 무슨 마음으로 올라가서는 만신창이가 되었나."
공중전화 부스 옆에 치솟은 벚나무 가지로 그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는 더 위로, 위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갈가리 찢어진 검정 비닐이 춤추고 있었다. 바람의 리듬과 그의 내면의 소리에 맞춰 격렬하게 흔들렸다. 갈퀴 같은 검은손이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올라와, 어서 올라와서 나를 풀어줘. 그러자 곧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올라오라. 바벨탑을 쌓자."
그는 자신이 조합한 말에 스스로 놀랐다. 뒤이어 제대로 된 성경구절이 흘러나왔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찢어진 것은 녀석의 마음일 텐데 달빛 교교한 깊은 밤에 예수를 유혹하는 마귀의 말소리라니! 아침은 아직 먼 곳에 잠들어 있고, 마귀는 바람과 함께 춤을 추며 손짓했다. 그는 낄낄거리는 저것을 당장에 떼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돌아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녀석이었다. 불길한 생각이 든 그는 어디냐고 다그쳤다.
"선생님! 아버지를! 내가 아버지를!"
전화가 뚝 끊어졌다. 녀석이 아버지를 어쨌다는 걸까. 떨리는 목소리였다. 다시 녀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당방위였어요! 아버지가 휘두르는 손을 잡아 밀어버렸는데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뒷일은 녀석의 어머니가 책임질 것이라며 작별 인사를 하고 통화는 끊어졌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꿈인지도 몰라. 그는 중얼거리며 기진한 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계속>
소설가 서유진 kua348@naver.com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하라는 슬로건은 비와 비람에 얼룩진 거리의 플래카드처럼 남루했다. 창의력 개발 개선 방안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교육 과제였지만 교육청에서 받은 연수라고 해야 창의적이지도 않았고, 맥락 없는 단어의 나열과 질문에 불과했다. 그는 동료들의 안일한 사고에 충격을 주고 싶었다. 새로움이 관건이었다. 창의적인 사고는 어디에서 오는가. 굳은살 박인 뇌신경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찔러 화한 자극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밤낮 책을 읽고 열심히 연구한다 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수많은 선행자 모두의 사고가 자신이 가진 세계의 지평선 너머로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며 자신을 '부지런'의 함정에 밀어 넣었다. 그렇다. 그는 너무 부지런해서 서너 시간의 수면 외에는 일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이다. 평소 그가 잠들기 전에 반듯이 누워 책을 읽는 것은 행여 잠을 이룰 수 있을까 해서다.
번쩍번쩍. 또 섬광이다! 빛이 춤춘다. 춤을 춘다. 자자, 자자, 잠 좀 자자. 오늘 할 일이 태산 같다. 그런데 강의도 강의지만 저 녀석을 어쩌지. 녀석의 아버지를 고발할까. 아니지, 술 마시고 엄마를 두들겨 패도 생활비를 대 준다잖아. 오늘 밤도 맨발로 도망쳐 나온 녀석이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리며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떨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일어나 잠옷을 벗고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단숨에 내달아 간다면 녀석의 집까지 십 분이면 족한 거리였다. 그는 캄캄한 새벽길을 달렸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개들이 달을 보고 짖었다. 지난주 새벽에 전화를 받고 갔을 때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맨발을 동동 굴리며 기다리던 녀석이 지금 막 자신을 향해 마주 달려올 듯하다. 밤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데 삼거리의 전봇대, 그 옆의 공중전화 부스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의 귀는 스산한 소리들의 기억을 재생시켰다. 공중전화 부스 쪽으로 이삼 미터 앞으로 다가갔을 때는 낄낄대는 바람소리, 컥컥거리는 녀석의 울음소리, 자신의 거친 숨소리, 모든 소리가 한데 어울려 하모니를 이루었다. 그는 비의로 가득 찬 소리의 삼중주를 들으며 하늘을 우러러봤는데.
"아! 아직도! 올라갈 때는 무슨 마음으로 올라가서는 만신창이가 되었나."
공중전화 부스 옆에 치솟은 벚나무 가지로 그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는 더 위로, 위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갈가리 찢어진 검정 비닐이 춤추고 있었다. 바람의 리듬과 그의 내면의 소리에 맞춰 격렬하게 흔들렸다. 갈퀴 같은 검은손이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올라와, 어서 올라와서 나를 풀어줘. 그러자 곧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올라오라. 바벨탑을 쌓자."
그는 자신이 조합한 말에 스스로 놀랐다. 뒤이어 제대로 된 성경구절이 흘러나왔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찢어진 것은 녀석의 마음일 텐데 달빛 교교한 깊은 밤에 예수를 유혹하는 마귀의 말소리라니! 아침은 아직 먼 곳에 잠들어 있고, 마귀는 바람과 함께 춤을 추며 손짓했다. 그는 낄낄거리는 저것을 당장에 떼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돌아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녀석이었다. 불길한 생각이 든 그는 어디냐고 다그쳤다.
"선생님! 아버지를! 내가 아버지를!"
전화가 뚝 끊어졌다. 녀석이 아버지를 어쨌다는 걸까. 떨리는 목소리였다. 다시 녀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당방위였어요! 아버지가 휘두르는 손을 잡아 밀어버렸는데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뒷일은 녀석의 어머니가 책임질 것이라며 작별 인사를 하고 통화는 끊어졌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꿈인지도 몰라. 그는 중얼거리며 기진한 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계속>
소설가 서유진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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