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북구 팔거산성서 신라시대 `목간(木簡)` 11점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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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작성일21-04-28 19:27본문
↑↑ 팔거산성 유적 전경. 사진제공=대구시
[경북신문=김범수기자] 대구시 기념물 제6호(1988년 지정)인 팔거산성에서 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이 대구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됐다.
목간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나무 조각을 다듬어 글씨를 적어두던 기록용 유물로, 지금으로 치면 물품 꼬리표나 송장 등의 용도로 쓰였다.
대구시는 "북구 노곡동에 있는 팔거산성에서 정밀 발굴조사한 결과 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石築) 7기와 집수지(集水地) 2기, 수구(水口) 등과 함께 목간이 발견됐다"고 28일 밝혔다.
이번 조사는 대구시 기념물인 팔거산성에 대한 정비·복원의 고고학적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대구시의 예산을 지원받아 북구청이 지난 2015년의 지표조사, 2018년의 시굴조사에 이어 지난해 10월부터 (재)화랑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학술발굴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석축은 조사지역 북쪽 경사면에 조성됐으며 일부 유구가 중복돼 있어 석축 사이에 축조 순서 또는 시기 차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집수지는 남반부 평탄면에 조성됐으며 추정 집수지 1호는 돌, 2호는 목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특히 목간이 출토된 추정 집수지 2호는 길이 7.8m, 너비 4.5m, 높이 약 3m이며, 면적은 35.1㎡이고 저수 용량은 약 10만5300ℓ다.
출토된 목간은 11점으로 확인됐다. 목간의 보존처리와 판독 등을 진행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목간의 적외선 사진 촬영을 진행하고 두 차례에 걸친 판독 자문회의를 통한 기초 조사를 마쳤다.
조사 결과 8점의 목간에는 한쪽에 끈을 묶기 위해 나무를 잘라냈으며 일부 목간에는 실제로 끈을 묶었던 흔적도 존재했다.
또 전체 11점 가운데 8점에서 글자 또는 글자의 흔적이 보이고 그 중에는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干支)와 곡식 이름이 등장한다.
↑↑ 목간 출토 유구(집수지 2호). 사진제공=대구시
먼저 간지는 4점의 목간에서 발견되며 임술년(壬戌年)과 병인년(丙寅年), 글자가 있는 부분이 파손돼 간지 중 두 번째 글자 일부와 세 번째 글자 ‘년(年)’만 보이는 사례 등 크게 3종류가 등장한다.
임술년과 병인년은 각각 602년과 606년으로 추정되며 이는 목간을 작성한 시점으로 여겨진다. 또 목간에는 보리(麦)와 벼(稻), 콩(大豆)이라는 곡식 이름이 등장해 당시 세금이나 물품을 징수한 것으로 보인다.
목간이 담고 있는 내용이 곡식과 관련된다는 점,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거점이 대부분 산성이었다는 점, 기존 신라 목간이 출토된 곳이 대부분 군사 및 행정 거점이었다는 점에서 팔거산성도 다른 출토 지역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하면서 물자가 집중되던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목간이 제작될 무렵인 7세기 초반부터 백제는 본격적으로 신라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신라의 서쪽지방 방어가 중요해졌고 낙동강과 금호강의 합류 지점 인근에 위치하면서 그 주변의 수로나 육로를 통제하던 팔거산성의 입지나 기능이 주목됐을 것이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대구에 있었던 지명으로 팔거리현(八居里縣)이 등장하는데, 이곳은 그동안 현재 팔거산성이 위치한 대구 칠곡 지역을 가리킨다고 막연히 추정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출토된 목간을 통해 대구 칠곡 지역을 중심으로 하면서 금호강 하류지역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통제하던 곳이 팔거산성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 목간 아래에 끈을 묶은 흔적
↑↑ 목간 출토(1호)
이밖에 목간에는 경남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서 보이는 ‘왕송(王松)’과 ‘하맥(下麦)’이라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표현도 등장한다.
또 목간의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가 나오지만 날짜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번에 출토된 목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한 해명은 추가 연구과제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목간은 특히 대구 소재 유적으로는 최초로 신라 목간이 출토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신라의 지방 유적에서 목간이 출토된 사례는 인천의 계양산성(桂陽山城), 경기도 하남의 이성산성(二聖山城), 경남 함안의 성산산성(城山山城) 유적 등이 있다. 또 지난 2019년 11월 대구 인근 지역인 경산 소월리에서 6세기 신라 토지 관련 목간이 발견되기도 했다.
배광식 북구청장은 “이번 발굴조사를 계기로 사적 제544호 대구 구암동 고분군과 더불어 시 기념물 제6호인 팔거산성의 국가사적 승격을 위한 종합정비계획을 마련하게 됐다"며 "북구지역의 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지역민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희준 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이번 팔거산성 발굴조사 성과와 출토된 목간 자료 등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시 기념물 팔거산성의 성격을 규명하고 위상을 밝히는 토대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범수 news1213@naver.com
[경북신문=김범수기자] 대구시 기념물 제6호(1988년 지정)인 팔거산성에서 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이 대구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됐다.
목간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나무 조각을 다듬어 글씨를 적어두던 기록용 유물로, 지금으로 치면 물품 꼬리표나 송장 등의 용도로 쓰였다.
대구시는 "북구 노곡동에 있는 팔거산성에서 정밀 발굴조사한 결과 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石築) 7기와 집수지(集水地) 2기, 수구(水口) 등과 함께 목간이 발견됐다"고 28일 밝혔다.
이번 조사는 대구시 기념물인 팔거산성에 대한 정비·복원의 고고학적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대구시의 예산을 지원받아 북구청이 지난 2015년의 지표조사, 2018년의 시굴조사에 이어 지난해 10월부터 (재)화랑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학술발굴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석축은 조사지역 북쪽 경사면에 조성됐으며 일부 유구가 중복돼 있어 석축 사이에 축조 순서 또는 시기 차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집수지는 남반부 평탄면에 조성됐으며 추정 집수지 1호는 돌, 2호는 목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특히 목간이 출토된 추정 집수지 2호는 길이 7.8m, 너비 4.5m, 높이 약 3m이며, 면적은 35.1㎡이고 저수 용량은 약 10만5300ℓ다.
출토된 목간은 11점으로 확인됐다. 목간의 보존처리와 판독 등을 진행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목간의 적외선 사진 촬영을 진행하고 두 차례에 걸친 판독 자문회의를 통한 기초 조사를 마쳤다.
조사 결과 8점의 목간에는 한쪽에 끈을 묶기 위해 나무를 잘라냈으며 일부 목간에는 실제로 끈을 묶었던 흔적도 존재했다.
또 전체 11점 가운데 8점에서 글자 또는 글자의 흔적이 보이고 그 중에는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干支)와 곡식 이름이 등장한다.
↑↑ 목간 출토 유구(집수지 2호). 사진제공=대구시
먼저 간지는 4점의 목간에서 발견되며 임술년(壬戌年)과 병인년(丙寅年), 글자가 있는 부분이 파손돼 간지 중 두 번째 글자 일부와 세 번째 글자 ‘년(年)’만 보이는 사례 등 크게 3종류가 등장한다.
임술년과 병인년은 각각 602년과 606년으로 추정되며 이는 목간을 작성한 시점으로 여겨진다. 또 목간에는 보리(麦)와 벼(稻), 콩(大豆)이라는 곡식 이름이 등장해 당시 세금이나 물품을 징수한 것으로 보인다.
목간이 담고 있는 내용이 곡식과 관련된다는 점,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거점이 대부분 산성이었다는 점, 기존 신라 목간이 출토된 곳이 대부분 군사 및 행정 거점이었다는 점에서 팔거산성도 다른 출토 지역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하면서 물자가 집중되던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목간이 제작될 무렵인 7세기 초반부터 백제는 본격적으로 신라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신라의 서쪽지방 방어가 중요해졌고 낙동강과 금호강의 합류 지점 인근에 위치하면서 그 주변의 수로나 육로를 통제하던 팔거산성의 입지나 기능이 주목됐을 것이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대구에 있었던 지명으로 팔거리현(八居里縣)이 등장하는데, 이곳은 그동안 현재 팔거산성이 위치한 대구 칠곡 지역을 가리킨다고 막연히 추정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출토된 목간을 통해 대구 칠곡 지역을 중심으로 하면서 금호강 하류지역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통제하던 곳이 팔거산성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 목간 아래에 끈을 묶은 흔적
↑↑ 목간 출토(1호)
이밖에 목간에는 경남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서 보이는 ‘왕송(王松)’과 ‘하맥(下麦)’이라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표현도 등장한다.
또 목간의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가 나오지만 날짜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번에 출토된 목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한 해명은 추가 연구과제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목간은 특히 대구 소재 유적으로는 최초로 신라 목간이 출토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신라의 지방 유적에서 목간이 출토된 사례는 인천의 계양산성(桂陽山城), 경기도 하남의 이성산성(二聖山城), 경남 함안의 성산산성(城山山城) 유적 등이 있다. 또 지난 2019년 11월 대구 인근 지역인 경산 소월리에서 6세기 신라 토지 관련 목간이 발견되기도 했다.
배광식 북구청장은 “이번 발굴조사를 계기로 사적 제544호 대구 구암동 고분군과 더불어 시 기념물 제6호인 팔거산성의 국가사적 승격을 위한 종합정비계획을 마련하게 됐다"며 "북구지역의 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지역민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희준 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이번 팔거산성 발굴조사 성과와 출토된 목간 자료 등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시 기념물 팔거산성의 성격을 규명하고 위상을 밝히는 토대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범수 news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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