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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 상인들이 인식한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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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C 국가연구소 연구원 정… 작성일21-02-1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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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CC 국가연구소 연구원 정진한[경북신문=GCC 국가연구소 연구원 정진한] 경북신문이 주최한 '2020 신라왕들의 축제'에서 열린 학술대회 '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에 참가한 학자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신라왕들과 신라인의 창조적인 글로벌 의식과 혜안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세계를 적응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신라에 관한 가장 구체적이고 정확한 지식이 필요했던 이들은 무역상들이다. 인도양의 서북쪽에서 온 무슬림들은 계절풍을 타고 동쪽으로 향해 인도를 에돌았고, 동남아시아에 기항한 후 중국으로 북상했다. 바람의 방향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원양 항행이 가능했던 시절 이들은, 바다의 지형과 식수의 보급 등 생존에 직결한 문제뿐 아니라 항로 위 각 지점의 특산물과 풍속 등의 무역에 필요한 정보까지 공유했어야만 했다.

수개월에서 수년간의 항해 도중에 많은 무슬림 항해자들은 몇 달 이상을 기착지에서 머무르거나 아예 눌러앉아서 때론 현지 여성들과 가정을 꾸려가면서 각 기항지를 오가는 무슬림 상인들을 위한 베이스 캠프를 설치했다. 엄청난 물적 재산을 투자한 이 위험한 항해를 성사시키기 위해 개별 상인들은 각자의 경험과 견문을 함께 공유해야만 했다, 이 경험과 전문(傳聞)은 궁극적으로 정보집의 형태로 출간되기도 하였는데, 그들 중 단연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서적은 『중국과 인도에 관한 소식』이다. 851년에 이 자료집을 엮은 술래이만은 중국을 오간 무슬림 상인이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보고 들은 동방 항해와 아시아 무역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 속에 신라로 가는 길과 신라에 관해 눈여겨 볼만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그는 신라에 관해 언급할 때 자신과 함께 중국을 오간 동료들 사이에는 신라에 다녀온 이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그는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다른 어떤 지역들보다 신라에 관해서 더 사실적이고 풍부한 자료를 남겼다. 이는 비록 자신들은 신라를 방문하지 못했지만 다른 무슬림들은 신라에 관해서 이것만큼은 알아두어야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그는 신라에 가려면 중국의 항구에서 바다를 건너가야 한다는 것과 신라인들의 피부색은 밝고, 신라에는 하얀 매가 있다는 점을 적시하였다.

눈에 띄게도 술래이만은 자신의 주요 무역 상대인 중국의 중요한 외교 상대로 신라를 언급하면서 이들의 각별한 관계를 나름의 공을 들여 소개하였다. 그는 중국의 주인(천자)과 신라 주민들이 선물(조공)을 교환한다고 하면서, “이 교환이 멈출때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라고 기술했다. 인도와 중국의 문화에 해박했던 그와 그의 동료들은 농경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가뭄이 지닌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즉, 그는 양국이 비가 멈춘다는 표현을 통해 양자 관계가 국가의 존망을 가로 지을 정도로 중요했음을 명시하였다.

술래이만이 동아시아를 소개하면서 일본과 발해를 소개하지 않았고 신라와 중국만을 소개하였다. 이런 편집의 취사선택에는 그들이 활동하던 9세기 전반의 동아시아 무역의 역학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9세기 전반이 끝나기 전 20-30년 가량은 신라의 장보고 선단이 한창 한중일 중계무역을 주도하던 시기였고, 당나라 내에서 활동하던 신라인들의 규모와 역할이 무척이나 왕성했던 때였다. 특히 당시의 신라인들의 무역기지는 가까운 산둥반도에서 양쯔강 유역에 그치지 않고 이미 양쯔 강 이남까지 진출한 상태했다. 따라서 당시 신라인들은 광저우에서 항저우까지를 주요 활동 무대로 하던 중국 내의 무슬림 상인들과 교류가 가능했다. 이를 통해 무슬림들은 자연스레 신라인들과의 만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직접 만남을 갖지 못한 무슬림들 역시 신라를 다녀온 중국인들이나 다른 외국인들과도 어울리거나 그네들이 싣고 온 신라에 관한 풍문을 접하면서 신라에 관해 차츰 알아 갈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시의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가 거의 단절되다 시피 했다. 일본 정부에서 당시 중국의 지배자였던 당나라로 파견하는 견당사는 몇 차례 실패를 겪다가 결국 폐지되었다. 자연스레 일본은 당나라와의 교류를 사실상 신라선과 신라인들, 그리고 신라의 중계 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또 주로 당나라의 북방에 근거지를 둔 발해 역시 주로 중국의 남방에서 활동하는 무슬림들에게 큰 중요성을 가지기 어려웠다. 반대로 당시 당나라 내에서 대규모로 집단을 이루고 중국내에서 확고한 뿌리를 내렸던 재당 신라인들과, 동아시아 무역의 주요 플레이어로 활동하던 신라상단은 무슬림들에게 그들이 전 세계의 무역 동향과 활동에 필요한 정보를 소개하는 것에 있어 상당한 중요성을 지녔다. 특히 신라의 가치는 신라 자체가 가진 장점과 더불어, 술래이만이 특히 강조한 한중관계의 특수성을 통해 배가되었다.
GCC 국가연구소 연구원 정…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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