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서 벗어나 유라시아로 - 도시간 연결하는 네트워크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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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작성일21-02-01 19:26본문
↑↑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경북신문=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북신문이 주최한 '2020 신라왕들의 축제'에서 열린 학술대회 '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에 참가한 학자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신라왕들과 신라인의 창조적인 글로벌 의식과 혜안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세계를 적응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
IV. 코로나 시대에 다시 보는 실크로드
- 실크로드는 낭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실크로드, 그리고 중국의 일대일로 등 지난 몇 년간 세계는 서로 경쟁적으로 유라시아 정책에 참여했고 다양한 사업들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문화사업중의 하나가 바로 유라시아 철도의 복원이었다.
지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그리고 현 정부의 신북방정책은 서로 다른 정부의 방향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정책의 내용과 목적은 비슷하다. 그만큼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유라시아 정책은 정부의 성향에 관계없이 우리에겐 너무나 중요한 사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실크로드와 관련된 사업은 천편일률이다 싶을 정도로 비슷하다. 유라시아 횡단 철도, 한민족 바이칼 기원론, 한류의 소개 등이다. 특히 유라시아 횡단 철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크로드의 로망을 떠오르게 하는 대표적인 사업이다.
유라시아 철도에 대한 한국인의 로망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광수가 1933년에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 '유정'일 것이다. 춘원의 대표작인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바이칼까지 가는 과정이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나왔다. 춘원 자신도 자바이칼(바이칼의 동쪽)의 큰 도시인 치타까지 열차로 여행을 한 경험이 그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춘원의 소설에 등장하는 실크로드에 대한 로망은 당시 일제가 먼저 꿈꾸던 세상이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만주와 시베리아로 침략을 해나가던 시점이었다. 철도는 바로 자신들의 침략을 위한 발판이었고, 철도회사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철도 여행을 사방으로 선전하여 관광산업을 진흥하려고 했다.
춘원의 소설뿐 아니라 영화나 가요와 같은 다양한 대중문화에서도 북방 유라시아로 가는 길은 미래를 향한 희망이요, 북방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처럼 묘사되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해방이 된 직후 1990년대까지 냉전의 장벽에 가로막혀 북방 유라시아는 꿈도 꿀 수 없었으니 결국 우리의 유라시아 실크로드에 대한 인식은 1930년대에 멈춰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한국의 실크로드에 대한 로망은 지난 세기 일본이 오매불망하던 북방 유라시아에 대한 환상의 아류라고 지적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실크로드의 본질은 고립에 있다.
원래 실크로드는 이어지는 도로가 아니라 사막 속에 고립되어 점같이 흩어진 도시를 이어주는 단거리의 교역로였다. 지금은 실크로드라고 하면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며 빠르게 물류가 이동하는 하이웨이를 떠올린다. 그런 교통수단은 근대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한나라 때에도 중국에서 로마까지 단번에 가는 루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은 사막에 고립된 오아시스의 각 도시와 그 다음 도시를 이어주는 간선도로 같은 역할을 했다. 건조한 사막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고립되어 형성된 도시간을 연결하는 초인적인 노력이 그 실크로드의 기반이 되었다. 바로 고립이라고 하는 자연지리적인 한계를 극복한 산물이다.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면 떠오르는 낙타 등에 짐을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캐러반의 길은 중국 신장(신강)성을 관통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바로 신강성의 남부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과 북부의 준가르 사막 사이의 길을 천산남로, 천산북로, 서역남로 등 3가지의 길이 그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굳이 멀쩡한 길을 놔두고 사막을 지나가야했을까. 원래는 신강성 북부에서 알타이 산맥에 이어지는 초원지역을 따라서 유라시아 유목민들이 오고갔던 초원루트가 발달해있다. 수 천년간 사용했던 초원루트를 버린 배경에는 한나라의 고육지책이 숨겨져있다. 흉노가 장악한 초원루트를 피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사막 근처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즉, 실크로드는 흉노의 발흥으로 중앙아시아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린 상황에서 고립된 지역을 서로 잇는 사막을 지나가는 루트를 택한 것이다.
이렇게 실크로드는 본래 장대한 대륙 간을 연결하기 위한 길이 아니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주변에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고립된 도시들이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뚫은 것이다. 중국과 로마를 왕래하는 대상이나 무역루트는 존재하지 않았고 실제로 불가능에 가깝다.
유럽에서 아시아를 한 번에 오고간 사람들은 중세 이후 마르코 폴로같은 여행자나 국가에서 파견한 신부나 사신들 같은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었다. 이렇듯 실크로드는 사막 근처에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고립되어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자연환경을 딛고 서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이익을 극대화하고 공존을 하기 위하여 만든 필사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실크로드는 바로 고립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간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고립과 그들 사이의 평등성에 있었다. 한나라 이 지역을 서역이라고 명명하고 진출하긴 했지만, 거점 위주로 점령을 할 수 있었을 뿐, 실질적인 지배를 할 수 없었다.
약 4500년전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이 남하하여 생긴 이 사막의 오아시사들은 몽골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생기기 전까지 각자의 나라를 지키면서 살아왔다. 이렇듯 대륙을 잇는 실크로드의 네트워크는 마치 인터넷(WWW)처럼 하나의 중심이 없이 서로 이어지는 단거리의 교역망에 근거하였고, 교역의 네트워크는 고립된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에서 연대를 하여서 만든 것이다. <계속>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kua348@naver.com
IV. 코로나 시대에 다시 보는 실크로드
- 실크로드는 낭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실크로드, 그리고 중국의 일대일로 등 지난 몇 년간 세계는 서로 경쟁적으로 유라시아 정책에 참여했고 다양한 사업들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문화사업중의 하나가 바로 유라시아 철도의 복원이었다.
지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그리고 현 정부의 신북방정책은 서로 다른 정부의 방향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정책의 내용과 목적은 비슷하다. 그만큼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유라시아 정책은 정부의 성향에 관계없이 우리에겐 너무나 중요한 사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실크로드와 관련된 사업은 천편일률이다 싶을 정도로 비슷하다. 유라시아 횡단 철도, 한민족 바이칼 기원론, 한류의 소개 등이다. 특히 유라시아 횡단 철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크로드의 로망을 떠오르게 하는 대표적인 사업이다.
유라시아 철도에 대한 한국인의 로망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광수가 1933년에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 '유정'일 것이다. 춘원의 대표작인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바이칼까지 가는 과정이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나왔다. 춘원 자신도 자바이칼(바이칼의 동쪽)의 큰 도시인 치타까지 열차로 여행을 한 경험이 그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춘원의 소설에 등장하는 실크로드에 대한 로망은 당시 일제가 먼저 꿈꾸던 세상이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만주와 시베리아로 침략을 해나가던 시점이었다. 철도는 바로 자신들의 침략을 위한 발판이었고, 철도회사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철도 여행을 사방으로 선전하여 관광산업을 진흥하려고 했다.
춘원의 소설뿐 아니라 영화나 가요와 같은 다양한 대중문화에서도 북방 유라시아로 가는 길은 미래를 향한 희망이요, 북방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처럼 묘사되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해방이 된 직후 1990년대까지 냉전의 장벽에 가로막혀 북방 유라시아는 꿈도 꿀 수 없었으니 결국 우리의 유라시아 실크로드에 대한 인식은 1930년대에 멈춰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한국의 실크로드에 대한 로망은 지난 세기 일본이 오매불망하던 북방 유라시아에 대한 환상의 아류라고 지적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실크로드의 본질은 고립에 있다.
원래 실크로드는 이어지는 도로가 아니라 사막 속에 고립되어 점같이 흩어진 도시를 이어주는 단거리의 교역로였다. 지금은 실크로드라고 하면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며 빠르게 물류가 이동하는 하이웨이를 떠올린다. 그런 교통수단은 근대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한나라 때에도 중국에서 로마까지 단번에 가는 루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은 사막에 고립된 오아시스의 각 도시와 그 다음 도시를 이어주는 간선도로 같은 역할을 했다. 건조한 사막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고립되어 형성된 도시간을 연결하는 초인적인 노력이 그 실크로드의 기반이 되었다. 바로 고립이라고 하는 자연지리적인 한계를 극복한 산물이다.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면 떠오르는 낙타 등에 짐을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캐러반의 길은 중국 신장(신강)성을 관통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바로 신강성의 남부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과 북부의 준가르 사막 사이의 길을 천산남로, 천산북로, 서역남로 등 3가지의 길이 그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굳이 멀쩡한 길을 놔두고 사막을 지나가야했을까. 원래는 신강성 북부에서 알타이 산맥에 이어지는 초원지역을 따라서 유라시아 유목민들이 오고갔던 초원루트가 발달해있다. 수 천년간 사용했던 초원루트를 버린 배경에는 한나라의 고육지책이 숨겨져있다. 흉노가 장악한 초원루트를 피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사막 근처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즉, 실크로드는 흉노의 발흥으로 중앙아시아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린 상황에서 고립된 지역을 서로 잇는 사막을 지나가는 루트를 택한 것이다.
이렇게 실크로드는 본래 장대한 대륙 간을 연결하기 위한 길이 아니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주변에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고립된 도시들이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뚫은 것이다. 중국과 로마를 왕래하는 대상이나 무역루트는 존재하지 않았고 실제로 불가능에 가깝다.
유럽에서 아시아를 한 번에 오고간 사람들은 중세 이후 마르코 폴로같은 여행자나 국가에서 파견한 신부나 사신들 같은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었다. 이렇듯 실크로드는 사막 근처에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고립되어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자연환경을 딛고 서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이익을 극대화하고 공존을 하기 위하여 만든 필사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실크로드는 바로 고립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간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고립과 그들 사이의 평등성에 있었다. 한나라 이 지역을 서역이라고 명명하고 진출하긴 했지만, 거점 위주로 점령을 할 수 있었을 뿐, 실질적인 지배를 할 수 없었다.
약 4500년전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이 남하하여 생긴 이 사막의 오아시사들은 몽골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생기기 전까지 각자의 나라를 지키면서 살아왔다. 이렇듯 대륙을 잇는 실크로드의 네트워크는 마치 인터넷(WWW)처럼 하나의 중심이 없이 서로 이어지는 단거리의 교역망에 근거하였고, 교역의 네트워크는 고립된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에서 연대를 하여서 만든 것이다. <계속>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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