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 (3-2)] 고립서 벗어나 유라시아로 - 거대한 세력 변동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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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작성일21-01-19 19:22본문
↑↑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경북신문=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 경북신문이 주최한 '2020 신라왕들의 축제'에서 열린 학술대회 '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에 참가한 학자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신라왕들과 신라인의 창조적인 글로벌 의식과 혜안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세계를 적응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
I. 2300년전 신라로 도망친 만리장성의 유목민·Ⅱ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진시황이 살았던 시절은 기원전 3세기 중반이다. 그러니 이 진한의 사람들이 전하는 얘기대로 한다면 지금부터 2300년 전에 중국 북방에서 만리장성을 쌓던 진나라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경주 일대로 내려와 진한의 일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얼핏 들으면 쉽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뜬금없어 보인다. 실제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지어내거나 착오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삼국지'의 저자는 막연하게 주워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듯 사람들이 쓰던 말까지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심지어 중국 내의 여러 방언 중에서도 연나라나 제나라가 아니라 바로 진나라의 말을 썼다는 친절한 해설까지 덧붙일 정도이다.
삼국지같은 가장 기본적인 역사책에서 이 정도로 자세하게 나오는 내용을 무작정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실물 자료가 없었던 탓에 여전히 물음표만 달려있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던 이 기록을 설명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로 최근에 속속 발견되고 있다. 2010년에 경주의 탑동에서 발굴된 변한 시대의 나무관무덤을 이 그 좋은 예다.
집을 개축하다가 나온 작은 유적이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초원 유목민들이 애용하는 동물 장식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특히 중국 북방지역에서도 특히 진(秦)나라의 변경에서 살다가 후에 진나라로 편입된 서융(西戎)이라는 사람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그뿐 아니라 안테나식 검의 장식이나 호랑이와 말의 모양을 한 허리띠 등 진한에서는 마한이나 변한과 달리 유독 북방 초원계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진수가 삼국지에 한 기록이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여기에서 놀라움은 그치지 않고 현해탄 건너의 일본에서도 중국 북방에서 유래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2011년에는 일본의 오사카 근처 비와호 근처 '가미고덴'이라는 유적에서 발굴된 청동검의 거푸집을 말한다. 만주와 한반도, 나아가 일본은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은 그 형태가 독특하고 손잡이와 검의 날을 따로 만드는 방식이다.
반면에, 중국북방과 유라시아 초원지역은 날렵한 검의 날과 손잡이를 함께 만든다. 그런데 가미고덴에서 발견된 거푸집에 표현된 동검은 바로 초원식의 동검이었다. 일본에서는 처음 발견된 형태이다. 가미고덴 유적에서 출토된 동검은 2400~2300년 전에 중국 만리장성 근처의 유목민들이 쓰는 초원식 동검과 가장 유사하다.
만약 동검이 1점 발견되었다면 우연한 선물이나 교류의 증거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검이 아니라 동검을 만드는 거푸집이 나왔다. 동검을 만드는 거푸집을 누구에게 선물할리는 없으니, 중국 북방의 사람들이 건너간 증거가 분명하다.
이렇듯, 최근에 다양한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중국 만리장성 일대에 있던 유목문화와 그 사람들이 머나먼 한반도 남쪽까지 내려온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전국시대 말기에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진나라는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쌓으면서 중국 북방의 초원 유목민족들을 압박했고, 그 결과 일부는 중국에 동화되고 또 일부는 사방으로 흩어져나갈 수 밖에 없었다. 유라시아를 뒤흔든 거대한 세력의 변동이 한반도와 멀리 일본까지 확산된 것이다. <계속>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kua348@naver.com
I. 2300년전 신라로 도망친 만리장성의 유목민·Ⅱ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진시황이 살았던 시절은 기원전 3세기 중반이다. 그러니 이 진한의 사람들이 전하는 얘기대로 한다면 지금부터 2300년 전에 중국 북방에서 만리장성을 쌓던 진나라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경주 일대로 내려와 진한의 일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얼핏 들으면 쉽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뜬금없어 보인다. 실제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지어내거나 착오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삼국지'의 저자는 막연하게 주워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듯 사람들이 쓰던 말까지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심지어 중국 내의 여러 방언 중에서도 연나라나 제나라가 아니라 바로 진나라의 말을 썼다는 친절한 해설까지 덧붙일 정도이다.
삼국지같은 가장 기본적인 역사책에서 이 정도로 자세하게 나오는 내용을 무작정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실물 자료가 없었던 탓에 여전히 물음표만 달려있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던 이 기록을 설명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로 최근에 속속 발견되고 있다. 2010년에 경주의 탑동에서 발굴된 변한 시대의 나무관무덤을 이 그 좋은 예다.
집을 개축하다가 나온 작은 유적이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초원 유목민들이 애용하는 동물 장식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특히 중국 북방지역에서도 특히 진(秦)나라의 변경에서 살다가 후에 진나라로 편입된 서융(西戎)이라는 사람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그뿐 아니라 안테나식 검의 장식이나 호랑이와 말의 모양을 한 허리띠 등 진한에서는 마한이나 변한과 달리 유독 북방 초원계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진수가 삼국지에 한 기록이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여기에서 놀라움은 그치지 않고 현해탄 건너의 일본에서도 중국 북방에서 유래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2011년에는 일본의 오사카 근처 비와호 근처 '가미고덴'이라는 유적에서 발굴된 청동검의 거푸집을 말한다. 만주와 한반도, 나아가 일본은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은 그 형태가 독특하고 손잡이와 검의 날을 따로 만드는 방식이다.
반면에, 중국북방과 유라시아 초원지역은 날렵한 검의 날과 손잡이를 함께 만든다. 그런데 가미고덴에서 발견된 거푸집에 표현된 동검은 바로 초원식의 동검이었다. 일본에서는 처음 발견된 형태이다. 가미고덴 유적에서 출토된 동검은 2400~2300년 전에 중국 만리장성 근처의 유목민들이 쓰는 초원식 동검과 가장 유사하다.
만약 동검이 1점 발견되었다면 우연한 선물이나 교류의 증거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검이 아니라 동검을 만드는 거푸집이 나왔다. 동검을 만드는 거푸집을 누구에게 선물할리는 없으니, 중국 북방의 사람들이 건너간 증거가 분명하다.
이렇듯, 최근에 다양한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중국 만리장성 일대에 있던 유목문화와 그 사람들이 머나먼 한반도 남쪽까지 내려온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전국시대 말기에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진나라는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쌓으면서 중국 북방의 초원 유목민족들을 압박했고, 그 결과 일부는 중국에 동화되고 또 일부는 사방으로 흩어져나갈 수 밖에 없었다. 유라시아를 뒤흔든 거대한 세력의 변동이 한반도와 멀리 일본까지 확산된 것이다. <계속>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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