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들에게 길을 묻다] 최초 독일 철학박사 `김중세`등장에 시작된 실크로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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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작성일20-12-29 19:58본문
↑↑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장 김중순[경북신문=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장 김중순 ] II. 연구의 초기 참여자들
1. 김중세 (1882-1948)
그는 1905〜1908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마친 후 1909년부터 1928년까지 19년간 독일에서 공부를 했다. 1926년에 라이프찌히에서 학위를 받았으니, 그는 최초의 독일 철학박사인 셈이다. 당대에 서양에서 학문을 연구한 동양인 학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191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중국 고대 논리학 발전 연구 The Development of the Logical Method in Ancient China」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 후스(胡適 1891〜1962), 1923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인생 이상(理想)에 관한 비교 연구 A Comparative Study on Life Ideals」로 박사학위를 받은 펑유란(馮友蘭 1895〜L990)이 있다. 이들의 연구가 비교철학(comparative philosophy)적 성격이 강하다면, 김중세는 문헌학(philology)적 성격이 강하다. 그 전에 일본 학자들도 있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가 1901년 유학을 떠나 독일, 프랑스, 헝가리 등에서 역사학을 연구하고 1903년 귀국했고, 난조 분유(南条文雄 1849-1927)는 1876년부터 옥스퍼드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일본 인도학의 기초를 놓았다. 김중세의 위상은 최초로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 교류를 시작했던 학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투르판에서 발굴된 프라티목샤 한문(漢文) 단편」(Ein Chinesisches Fragment des Pratimoksha aus Turfan)이라는 1928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은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끈다. 논문집 Biblographia는 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폰 르 콕 박사가 투루판 탐험에서 발견한 프라티모크샤를 한국인 학자 김중세 박사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텍스트 판본과 비교하였다. 이 논문집은 대학자이자 그의 지도교수인 Friedrich Wilhelm Karl Müller (1863〜1930)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며 기리는 의미를 담아 출간되었다.
‘프라티목샤(Pratimoksha)’는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의 음역으로, 불교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 조항을 모아 놓은 계율서이이다. 논문은 전체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 부분은 해제, 둘째 부분은 단편 조각 실물의 앞뒷면 사진 및 김중세가 해서(楷書)로 필사한 것의 사진,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은 독일어 번역문과 부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록에서는 1871년에 발표된 영국의 동양학자 비일(Samuel Beal, 1825-1889)의 영역본 『Catena of Buddhist Scriptures from the Chinese』 204쪽과 김중세 자신의 번역본을 대조해 놓았다. 이 논문은 새로 발견한 판본과 기존 판본을 비교하는 판본학 연구인 셈이다. 그 학술적 가치는 그동안 찾지 못하고 있던 불교의 계통을 메꾸어주고, 중앙아시아 고대불교의 행적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투루판에서 프라티목샤 단편을 발견했다는 폰 르 콕(Albert von Le Coq, 1860〜1930)은 도대체 누구인가? 영국의 스타인의 1차 탐험보고서에 자극을 받은 독일이 1902~1914년에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투르판 탐사대를 파견했을 때 폰 르 콕은 이 가운데 2〜4차에 참여했고 2차와 3차 탐사의 대장이었다. 프라티목샤 단편을 발굴한 것은 1904년의 제2차 탐사 때였는데, 여기서 그는 103점의 유물을 발굴했다.
발굴 유물의 상당 부분은 그림이나 벽화였고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와 초기 불교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문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산스크리트어, 시리아어, 소그드어, 위구르어, 한문 등 다양한 텍스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쓴 발굴행위 자체가 하나의 모험담 형태로 조명을 받았을 뿐, 발굴의 내용물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다양한 고대 언어에 정통한 문헌학자들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김중세의 등장은 실크로드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참여했던 연구 과정을 논문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르 콕(Le Coq) 교수는 1919년 겨울에 내가 수행한 한문본(漢文本) 프라티목샤 단편의 연구 결과를 출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논문을 베를린 민족학박물관 뮐러 교수의 60세를 기념하는 논문집에 수록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자료는 1904년과 1905년 투루판 토욕에서 발굴된 것이다. 그 때까지 발굴된 단편들은 주로 두루마리 형태, 즉 권자본(卷子本)이며 몇몇은 책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것은 인도 전통의 포티(pothi) 형태로 되어 있다. 이 포티 제본 텍스트의 왼쪽 상단 끝부분은 심하게 손상되어 있고 전체 크기는 세로 26.9센티, 가로 8.9센티이다. 이 고서(古書)에 실린 불교 텍스트 프라티목샤(波羅提木叉)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100가지 계율 중 41번째부터 64번째 조목(條目)까지가 그 내용이다. <계속>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kua348@naver.com
1. 김중세 (1882-1948)
그는 1905〜1908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마친 후 1909년부터 1928년까지 19년간 독일에서 공부를 했다. 1926년에 라이프찌히에서 학위를 받았으니, 그는 최초의 독일 철학박사인 셈이다. 당대에 서양에서 학문을 연구한 동양인 학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191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중국 고대 논리학 발전 연구 The Development of the Logical Method in Ancient China」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 후스(胡適 1891〜1962), 1923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인생 이상(理想)에 관한 비교 연구 A Comparative Study on Life Ideals」로 박사학위를 받은 펑유란(馮友蘭 1895〜L990)이 있다. 이들의 연구가 비교철학(comparative philosophy)적 성격이 강하다면, 김중세는 문헌학(philology)적 성격이 강하다. 그 전에 일본 학자들도 있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가 1901년 유학을 떠나 독일, 프랑스, 헝가리 등에서 역사학을 연구하고 1903년 귀국했고, 난조 분유(南条文雄 1849-1927)는 1876년부터 옥스퍼드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일본 인도학의 기초를 놓았다. 김중세의 위상은 최초로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 교류를 시작했던 학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투르판에서 발굴된 프라티목샤 한문(漢文) 단편」(Ein Chinesisches Fragment des Pratimoksha aus Turfan)이라는 1928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은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끈다. 논문집 Biblographia는 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폰 르 콕 박사가 투루판 탐험에서 발견한 프라티모크샤를 한국인 학자 김중세 박사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텍스트 판본과 비교하였다. 이 논문집은 대학자이자 그의 지도교수인 Friedrich Wilhelm Karl Müller (1863〜1930)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며 기리는 의미를 담아 출간되었다.
‘프라티목샤(Pratimoksha)’는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의 음역으로, 불교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 조항을 모아 놓은 계율서이이다. 논문은 전체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 부분은 해제, 둘째 부분은 단편 조각 실물의 앞뒷면 사진 및 김중세가 해서(楷書)로 필사한 것의 사진,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은 독일어 번역문과 부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록에서는 1871년에 발표된 영국의 동양학자 비일(Samuel Beal, 1825-1889)의 영역본 『Catena of Buddhist Scriptures from the Chinese』 204쪽과 김중세 자신의 번역본을 대조해 놓았다. 이 논문은 새로 발견한 판본과 기존 판본을 비교하는 판본학 연구인 셈이다. 그 학술적 가치는 그동안 찾지 못하고 있던 불교의 계통을 메꾸어주고, 중앙아시아 고대불교의 행적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투루판에서 프라티목샤 단편을 발견했다는 폰 르 콕(Albert von Le Coq, 1860〜1930)은 도대체 누구인가? 영국의 스타인의 1차 탐험보고서에 자극을 받은 독일이 1902~1914년에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투르판 탐사대를 파견했을 때 폰 르 콕은 이 가운데 2〜4차에 참여했고 2차와 3차 탐사의 대장이었다. 프라티목샤 단편을 발굴한 것은 1904년의 제2차 탐사 때였는데, 여기서 그는 103점의 유물을 발굴했다.
발굴 유물의 상당 부분은 그림이나 벽화였고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와 초기 불교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문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산스크리트어, 시리아어, 소그드어, 위구르어, 한문 등 다양한 텍스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쓴 발굴행위 자체가 하나의 모험담 형태로 조명을 받았을 뿐, 발굴의 내용물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다양한 고대 언어에 정통한 문헌학자들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김중세의 등장은 실크로드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참여했던 연구 과정을 논문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르 콕(Le Coq) 교수는 1919년 겨울에 내가 수행한 한문본(漢文本) 프라티목샤 단편의 연구 결과를 출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논문을 베를린 민족학박물관 뮐러 교수의 60세를 기념하는 논문집에 수록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자료는 1904년과 1905년 투루판 토욕에서 발굴된 것이다. 그 때까지 발굴된 단편들은 주로 두루마리 형태, 즉 권자본(卷子本)이며 몇몇은 책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것은 인도 전통의 포티(pothi) 형태로 되어 있다. 이 포티 제본 텍스트의 왼쪽 상단 끝부분은 심하게 손상되어 있고 전체 크기는 세로 26.9센티, 가로 8.9센티이다. 이 고서(古書)에 실린 불교 텍스트 프라티목샤(波羅提木叉)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100가지 계율 중 41번째부터 64번째 조목(條目)까지가 그 내용이다. <계속>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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