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들에게 길을 묻다] 1952년 한국서 첫 `실크로드`탄생 - 돈황 예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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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작성일20-12-17 19:36본문
[경북신문=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장 김중순] ↑↑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장 김중순II. 연구의 초기 참여자들
한국에서 '실크로드'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출판물에 나타난 것은 1952년이다. 동양사학 연구자인 조좌호(曺佐鎬, 1917∼1991)가 저술한 '세계문화사'에 '비단길(Silk Road)'의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그가 일본 동경제대에서 동양사학(1941년 입학)을 전공했으니, 일본에서는 실크로드라는 용어가 1930년대에 갓 등장했음을 고려하면, 그 용어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국내에서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다.
그것은 자료의 수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했던 이상백(1904-1966)은 갑골문 등 중국 고대 문물에도 조예가 깊었다.
수많은 중국 고서와 유물을 수집하였으며 돈황 사본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그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와세다 대학 해외특약연구원 신분으로 북경에 머물렀는데, 이때 몇 건의 돈황 사본 두루마리를 한국으로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大般涅槃經卷第三'과 '大般若波羅…蜜多經卷四三八'은 그의 작고 2년 후인 1968년 10월 대구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한 건인 '大般若波羅…蜜多經卷五十'은 1971년 그의 부인이 서울대학교도서관에 기증하여 규장각 장서로 귀속되었다.
대구에서 발견된 두 건 중 '大般若波羅…蜜多經卷四三八'은 현재 소재가 불명확하다.
이상백 교수는 비록 돈황학을 전문가는 아니지만, 1930-40년대에 이미 돈황 사본에 관심을 갖고 이를 소장했으며, 이 사본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점에서 한국 돈황학에 있어 일정한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순한 자료 수집을 넘어 실제 연구의 흔적을 남긴 이들도 있다. 서울대 김태준 교수는 1930년대 초에 이미 돈황에서 발견된 문학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소설사(朝鮮小說史)'의 1931년 1월 19일자 글에서 돈황 장경동에서 발견된 '당태종입명실기(唐太宗入冥實記)'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 고담(古談)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1932년 1월 11일자 동아일보 연재 '중국시조소론(中國時調小論)'에서는 유반농(劉半農)이 파리도서관에서 발견한 돈황본 '태자오경전(太子五更轉)'이 중국 시조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김태준은 본래 중문학자이나 한국 고대문학에도 매우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한국문학사를 서술할 때 중국 돈황문학 자료까지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 사람의 특이한 인물이 있었으니 한낙연(1898-1947)이다. 그는 길림 용정에서 태어난 조선족 출신 한국인 화가로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봉천에 미술전문학교를 세워 교장을 맡았다.
1929년에 파리로 유학을 떠나 국립루브르예술학원에서 후기 인상주의 화풍을 섭렵하고 세 차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돈황 학자인 상서홍(常書鴻)을 만났다.
상서홍은 나중에 돈황예술연구소 소장, 돈황문물연구소 소장과 돈황연구원 명예원장을 역임하는 등 '돈황예술의 수호신'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돈황예술 분야에서 절대적 위상을 갖게 된 사람이었다.
1937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한낙연은 항일운동과 정치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1943년부터는 상서홍의 후원으로 실크로드 소수민족의 삶과 인물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1946년 여름에 처음으로 신강 배성(拜城)의 키질 석굴에 가서 현지 탐사를 진행하고 유화 기법으로 석굴 벽화를 모사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막고굴로 가서 열흘 동안 머물며 돈황 벽화를 모사했다.
1947년 4월 한낙연은 학생과 조수들을 데리고 키질 석굴을 두 번째로 방문하여 두 달간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1947년 비행기사고를 당해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는 총 165폭의 그림을 남겼다. 석굴의 벽화를 모사한 32폭 가운데, 10폭은 돈황 석굴을, 나머지 22폭은 키질 천불동 벽화를 모사한 것이다.
이 그림들 중 12폭은 수채화이고 20폭은 유화이다. 벽화 외에 사생화 133폭이 있다.
그가 자신만의 독특한 유화와 사생 기법으로 키질석굴과 돈황 막고굴 벽화를 모사했다는 점은 돈황 예술사의 하나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중국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은 한낙연은 성성(盛成) 같은 학자로부터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벽화 모사의 핵심은 자기만의 해석보다는 원화 자체의 세밀한 모사에 있다.
따라서 그의 돈황 벽화 모사는 작품 자체로는 크게 주목받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실크로드의 일상과 인물 그림이 그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작 전시회는 1988년에 북경에서, 1990년에 연길(延吉)에서, 그리고 200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낙연 전시회를 열렸다.
서구에서 초기 실크로드학이 붐을 일으키고 있을 때, 한국은 일제 강점기였다. 자료가 있어도 연구할 만한 학자가 없었고, 학자가 있어도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학계와 예술계는 서구의 연구 작업을 그냥 쳐다보고 있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국제적인 학술교류 시스템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결국 본격적인 연구는 해외에서 이루어졌고,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김중세와 김구경, 이구조 같은 분들이다. <계속>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kua348@naver.com
한국에서 '실크로드'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출판물에 나타난 것은 1952년이다. 동양사학 연구자인 조좌호(曺佐鎬, 1917∼1991)가 저술한 '세계문화사'에 '비단길(Silk Road)'의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그가 일본 동경제대에서 동양사학(1941년 입학)을 전공했으니, 일본에서는 실크로드라는 용어가 1930년대에 갓 등장했음을 고려하면, 그 용어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국내에서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다.
그것은 자료의 수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했던 이상백(1904-1966)은 갑골문 등 중국 고대 문물에도 조예가 깊었다.
수많은 중국 고서와 유물을 수집하였으며 돈황 사본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그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와세다 대학 해외특약연구원 신분으로 북경에 머물렀는데, 이때 몇 건의 돈황 사본 두루마리를 한국으로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大般涅槃經卷第三'과 '大般若波羅…蜜多經卷四三八'은 그의 작고 2년 후인 1968년 10월 대구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한 건인 '大般若波羅…蜜多經卷五十'은 1971년 그의 부인이 서울대학교도서관에 기증하여 규장각 장서로 귀속되었다.
대구에서 발견된 두 건 중 '大般若波羅…蜜多經卷四三八'은 현재 소재가 불명확하다.
이상백 교수는 비록 돈황학을 전문가는 아니지만, 1930-40년대에 이미 돈황 사본에 관심을 갖고 이를 소장했으며, 이 사본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점에서 한국 돈황학에 있어 일정한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순한 자료 수집을 넘어 실제 연구의 흔적을 남긴 이들도 있다. 서울대 김태준 교수는 1930년대 초에 이미 돈황에서 발견된 문학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소설사(朝鮮小說史)'의 1931년 1월 19일자 글에서 돈황 장경동에서 발견된 '당태종입명실기(唐太宗入冥實記)'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 고담(古談)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1932년 1월 11일자 동아일보 연재 '중국시조소론(中國時調小論)'에서는 유반농(劉半農)이 파리도서관에서 발견한 돈황본 '태자오경전(太子五更轉)'이 중국 시조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김태준은 본래 중문학자이나 한국 고대문학에도 매우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한국문학사를 서술할 때 중국 돈황문학 자료까지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 사람의 특이한 인물이 있었으니 한낙연(1898-1947)이다. 그는 길림 용정에서 태어난 조선족 출신 한국인 화가로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봉천에 미술전문학교를 세워 교장을 맡았다.
1929년에 파리로 유학을 떠나 국립루브르예술학원에서 후기 인상주의 화풍을 섭렵하고 세 차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돈황 학자인 상서홍(常書鴻)을 만났다.
상서홍은 나중에 돈황예술연구소 소장, 돈황문물연구소 소장과 돈황연구원 명예원장을 역임하는 등 '돈황예술의 수호신'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돈황예술 분야에서 절대적 위상을 갖게 된 사람이었다.
1937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한낙연은 항일운동과 정치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1943년부터는 상서홍의 후원으로 실크로드 소수민족의 삶과 인물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1946년 여름에 처음으로 신강 배성(拜城)의 키질 석굴에 가서 현지 탐사를 진행하고 유화 기법으로 석굴 벽화를 모사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막고굴로 가서 열흘 동안 머물며 돈황 벽화를 모사했다.
1947년 4월 한낙연은 학생과 조수들을 데리고 키질 석굴을 두 번째로 방문하여 두 달간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1947년 비행기사고를 당해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는 총 165폭의 그림을 남겼다. 석굴의 벽화를 모사한 32폭 가운데, 10폭은 돈황 석굴을, 나머지 22폭은 키질 천불동 벽화를 모사한 것이다.
이 그림들 중 12폭은 수채화이고 20폭은 유화이다. 벽화 외에 사생화 133폭이 있다.
그가 자신만의 독특한 유화와 사생 기법으로 키질석굴과 돈황 막고굴 벽화를 모사했다는 점은 돈황 예술사의 하나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중국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은 한낙연은 성성(盛成) 같은 학자로부터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벽화 모사의 핵심은 자기만의 해석보다는 원화 자체의 세밀한 모사에 있다.
따라서 그의 돈황 벽화 모사는 작품 자체로는 크게 주목받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실크로드의 일상과 인물 그림이 그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작 전시회는 1988년에 북경에서, 1990년에 연길(延吉)에서, 그리고 200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낙연 전시회를 열렸다.
서구에서 초기 실크로드학이 붐을 일으키고 있을 때, 한국은 일제 강점기였다. 자료가 있어도 연구할 만한 학자가 없었고, 학자가 있어도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학계와 예술계는 서구의 연구 작업을 그냥 쳐다보고 있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국제적인 학술교류 시스템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결국 본격적인 연구는 해외에서 이루어졌고,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김중세와 김구경, 이구조 같은 분들이다. <계속>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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