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정래영 선생 후손 자부심 가득… 감포 곡창지대 이름난 `팔조리`
페이지 정보
김영식 작성일20-12-10 19:04본문
↑↑ 팔조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감포읍 팔조리(八助里)는 104 가구에 18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의 지형이 팔자(八字) 모양으로 생겼으며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살아라는 뜻으로 팔조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매곡, 홍덕, 양지, 음지, 수제 마을 등 5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으며 최근에는 10여개 정도의 펜션이 들어선 해인마을이 새로 생겨났다. 매곡은 매화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며 홍덕은 임진왜란 때 김소위 장군과 함께 죽은 말의 색깔이 붉은색이었고 주인과 함께 죽은 충직함을 기리기 위해 홍덕이라고 했다. 양지는 남쪽을 향해 볕이 잘 드는 마을이며, 음지는 양지마을의 맞은 편으로 해가 일찍 지는 마을이다. 수제는 가뭄이 극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 임왕규 이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마을회관에서 원로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고 있다.
팔조리는 감포의 곡창지대라고 일컬어진다. 주민 100%가 농업에 종사하며 감포읍에서는 가장 많은 농지를 가지고 있다. 해마다 추수를 하고 난 뒤 수매를 하면 팔조리가 가장 많은 양을 내놨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경감로가 생겨나면서 많은 농지가 도로에 편입돼 수확량이 대폭 감소했다. 그리고 농업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천수답은 대부분 휴경지로 변했다.
↑↑ 팔조리의 길상사 모습.
팔조리는 마을마다 특정 성씨의 집성촌으로 이뤄져 있었다. 양지마을은 남원 양씨, 수제마을과 매곡마을에는 밀양 박씨, 음지마을에는 진주 하씨, 홍덕마을에는 연일 정씨가 모여 살았다. 그래서 각 성씨별로 단합이 잘 이뤄지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구조는 흐트러졌고 지금은 각성바지들이 살아가고 있다.
↑↑ 음지마을에 있는 진주 하씨의 정자 연암정.
아무리 농사가 잘되는 마을이라고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주민들이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산에서 나물을 뜯어서 죽을 끓여 먹었고 소나무껍질로 연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을철 수확을 해도 공출을 하고 나면 남는 곡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에는 다소 나은 삶이 시작됐다. 그러나 심각한 가뭄이 시작돼 형편이 단번에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비로소 쌀밥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 독립유공자 정래영 선생의 생가.
새마을운동은 팔조리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지게를 지고 논두렁을 걸어가다가 마주 오는 사람을 만나면 비껴가야 할 정도로 좁은 농로였던 길이 리어카가 다닐 수 있고 경운기도 씽씽 달리는 길로 뚫렸던 것이다.
임왕규 이장은 "해방 이후 양식 걱정 없이 살던 팔조리가 지금은 심각한 고령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그러나 마을 주민의 화합을 이끌어 내고 연세 드신 어른들이 농사를 편하게 짓도록 하기 위해 농기계 보급사업을 펼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펜션이 들어선 해인마을.
임 이장은 또 "몇 년 전 경주시로부터 5억원의 예산을 받아 창조마을 사업으로 안길을 확장하고 마을가꾸기 사업을 펼쳤다"며 "마을을 떠났던 자녀들이 귀농귀촌하지 않는 이상 이 마을이 다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은 참으로 묘연해 안타깝다"고 했다.
↑↑ 팔조리의 최고령자 정형화 할아버지.
팔조리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독립유공자 정래영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점이다. 정래영 선생은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그 후 경남 지방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에 노력했으며 1920년 일제에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와 북경, 상해임시정부 등을 왕래하며 여전히 군자금 모집에 큰 힘을 기울였고 귀국 후 지하운동을 펼치다가 해방을 맞았다. 건국 이후 초대 감포읍의원을 지내면서 지역 발전에도 노력한 정 선생은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과 건국공훈 훈장을 받았다.
정 선생의 차남 정형화(93) 할아버지는 팔조리 최고령자다. 정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늘 왜놈 순사가 집에서 매복하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또 "해방 되던 날 아버지가 감개무량한 모습으로 태극기를 그리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며 "평생을 독립운동가의 자식이라는 자랑스러움에 살면서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 팔조리 주민들이 월성원전을 견학하고 있다.
월성원전의 자매부서는 대외협력처 SF사업준비파트다. 박찬영 대리는 "전통적인 농촌마을인 팔조리의 주민들은 늘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며 "독립유공자 정래영 선생의 후손들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팔조리의 발전을 위해 자매부서가 각별하게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경북신문=김영식기자] 감포읍 팔조리(八助里)는 104 가구에 18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의 지형이 팔자(八字) 모양으로 생겼으며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살아라는 뜻으로 팔조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매곡, 홍덕, 양지, 음지, 수제 마을 등 5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으며 최근에는 10여개 정도의 펜션이 들어선 해인마을이 새로 생겨났다. 매곡은 매화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며 홍덕은 임진왜란 때 김소위 장군과 함께 죽은 말의 색깔이 붉은색이었고 주인과 함께 죽은 충직함을 기리기 위해 홍덕이라고 했다. 양지는 남쪽을 향해 볕이 잘 드는 마을이며, 음지는 양지마을의 맞은 편으로 해가 일찍 지는 마을이다. 수제는 가뭄이 극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 임왕규 이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마을회관에서 원로들과 함께 환담을 나누고 있다.
팔조리는 감포의 곡창지대라고 일컬어진다. 주민 100%가 농업에 종사하며 감포읍에서는 가장 많은 농지를 가지고 있다. 해마다 추수를 하고 난 뒤 수매를 하면 팔조리가 가장 많은 양을 내놨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경감로가 생겨나면서 많은 농지가 도로에 편입돼 수확량이 대폭 감소했다. 그리고 농업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천수답은 대부분 휴경지로 변했다.
↑↑ 팔조리의 길상사 모습.
팔조리는 마을마다 특정 성씨의 집성촌으로 이뤄져 있었다. 양지마을은 남원 양씨, 수제마을과 매곡마을에는 밀양 박씨, 음지마을에는 진주 하씨, 홍덕마을에는 연일 정씨가 모여 살았다. 그래서 각 성씨별로 단합이 잘 이뤄지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구조는 흐트러졌고 지금은 각성바지들이 살아가고 있다.
↑↑ 음지마을에 있는 진주 하씨의 정자 연암정.
아무리 농사가 잘되는 마을이라고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주민들이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산에서 나물을 뜯어서 죽을 끓여 먹었고 소나무껍질로 연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을철 수확을 해도 공출을 하고 나면 남는 곡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에는 다소 나은 삶이 시작됐다. 그러나 심각한 가뭄이 시작돼 형편이 단번에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비로소 쌀밥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 독립유공자 정래영 선생의 생가.
새마을운동은 팔조리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지게를 지고 논두렁을 걸어가다가 마주 오는 사람을 만나면 비껴가야 할 정도로 좁은 농로였던 길이 리어카가 다닐 수 있고 경운기도 씽씽 달리는 길로 뚫렸던 것이다.
임왕규 이장은 "해방 이후 양식 걱정 없이 살던 팔조리가 지금은 심각한 고령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그러나 마을 주민의 화합을 이끌어 내고 연세 드신 어른들이 농사를 편하게 짓도록 하기 위해 농기계 보급사업을 펼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펜션이 들어선 해인마을.
임 이장은 또 "몇 년 전 경주시로부터 5억원의 예산을 받아 창조마을 사업으로 안길을 확장하고 마을가꾸기 사업을 펼쳤다"며 "마을을 떠났던 자녀들이 귀농귀촌하지 않는 이상 이 마을이 다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은 참으로 묘연해 안타깝다"고 했다.
↑↑ 팔조리의 최고령자 정형화 할아버지.
팔조리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독립유공자 정래영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점이다. 정래영 선생은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그 후 경남 지방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에 노력했으며 1920년 일제에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와 북경, 상해임시정부 등을 왕래하며 여전히 군자금 모집에 큰 힘을 기울였고 귀국 후 지하운동을 펼치다가 해방을 맞았다. 건국 이후 초대 감포읍의원을 지내면서 지역 발전에도 노력한 정 선생은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과 건국공훈 훈장을 받았다.
정 선생의 차남 정형화(93) 할아버지는 팔조리 최고령자다. 정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늘 왜놈 순사가 집에서 매복하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또 "해방 되던 날 아버지가 감개무량한 모습으로 태극기를 그리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며 "평생을 독립운동가의 자식이라는 자랑스러움에 살면서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 팔조리 주민들이 월성원전을 견학하고 있다.
월성원전의 자매부서는 대외협력처 SF사업준비파트다. 박찬영 대리는 "전통적인 농촌마을인 팔조리의 주민들은 늘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며 "독립유공자 정래영 선생의 후손들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팔조리의 발전을 위해 자매부서가 각별하게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