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인접한 농촌마을로 온기·품위 넘치는 `전촌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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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작성일20-12-06 19:38본문
↑↑ 전촌1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감포읍 전촌(典村)1리는 바다와 인접해 있지만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주민 대부분이 농사일에 종사하면서 전통 농촌마을의 모습을 이어오고 있다. 바다와는 불과 1km도 떨어져 있지 않지만 본격적으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 김대원 이장(가운데)이 조승모 전 이장(오른쪽)과 함께 마을 일을 의논하고 있다.
전촌1리는 122가구 219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성두마을, 고새마을, 구름마을, 거마장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성두마을은 신라시대 내성 아래 형성된 마을이다. 또 고새마을은 옛 성터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고성마을이라고 부르다가 음이 변해 고새마을이라고 불려왔다.
↑↑ 전촌1리 본마을인 성두마을 입구의 모습.
구름마을은 굴과 같은 큰 우물이 있다고 해서 굴마을이라고 불렀으나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발언하기 쉽도록 구름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을 운촌(雲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일제의 잔재라고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마장은 감포와 가까운 바닷가 인근의 야산에 있는 마을이다. 신라시대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망대로 군졸과 말을 주둔했던 곳이라고 한다.
↑↑ 전촌1리의 고새마을(왼쪽)과 구름마을(오른쪽)의 모습.
이 마을의 농사는 벼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콩과 보리도 함께 재배한다. 하지만 들이 좁아 소출이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이 마을 원로인 최해두(75)씨는 "과거 한 집안에 6~7명의 식구가 살 때에는 좁은 들판에서 나는 곡식으로 먹고 살기에 매우 빠듯했다"며 "하지만 산업화 이후 젊은이들이 돈을 벌러 대도시로 나가고 나니 비로소 식량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했다.
↑↑ 고새마을의 소나무밭.
식량이 모자라던 때 이 마을 사람들은 감포항에 나가서 어부들의 일손을 돕는 하루벌이를 하고 해산물을 사와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최씨는 "보릿고개가 되면 바닷가로 나가 일손을 돕고 품삯으로 해조류를 얻어오면 그것으로 죽을 쑤거나 반찬으로 먹었다"며 "지금은 귀한 음식이었지만 그때는 구하기 쉬웠는데 당시 해조류를 많이 먹은 까닭에 감포나 우리 마을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구름마을의 전형적인 농가모습.
감포항에서 잡은 수산물들은 대도시로 나아가기 위해 추령재를 넘어가야 했다.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신선할 때 추령재를 넘어 대도시에 내다 팔아야 했지만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에는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더러는 감포항 인근 마을에 헐값으로 팔아치워야 할 경우가 많았다. 전촌마을 사람들은 감포항의 해산물들, 그 가운데 고등어나 멸치 등을 싼 값에 사서 시래기를 넣고 죽을 쑤거나 반찬을 해 먹었다고 했다.
↑↑ 전촌1리의 최고령자 김부일 할아버지.
인근의 동해안 마을들과는 달리 전촌1리는 관광객의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는 마을이다. 따라서 다른 마을에 흔히 볼 수 있는 숙박업소나 카페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김대원 이장은 "비록 다른 바닷가 마을에 비해 가난하게 살았지만 농촌의 따뜻한 인심은 잘 간직된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전촌1리는 또 양반마을로 알려져 있다. 오래 전에는 경주최씨와 김해김씨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고 성두마을로 접어들면 글 읽는 소리가 맑고 또랑하게 들렸다고 한다.
김 이장은 해마다 줄어드는 인구로 고민이 많다고 했다. 김 이장은 "볍씨를 신청하는 농가와 수매하는 가구가 해마다 줄어드는 모습이 확연하게 느껴진다"며 "젊은이들이 아 마을로 돌아와 마을의 발전을 위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는 한 마을이 계속 유지되기 어렵지 않을까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 제2발전소 연료부 직원들이 자매마을 환경정화활동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김부일(96) 할아버지다. 김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14대째 살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는 군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겼고 해방 이후에는 좌우익 갈등으로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 다녔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배를 타며 이리저리 떠돌면서 어느 한쪽에도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안정이 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월성원전의 자매부서는 제2발전소 연료부다. 이동훈 대리는 "주민들이 온기와 품위가 넘치지만 발전 요소가 부족해 매우 안타까운 마을이 전촌1리"라며 "농촌마을이 새롭게 부각되고 이 마을의 장점이 크게 부각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경북신문=김영식기자] 감포읍 전촌(典村)1리는 바다와 인접해 있지만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주민 대부분이 농사일에 종사하면서 전통 농촌마을의 모습을 이어오고 있다. 바다와는 불과 1km도 떨어져 있지 않지만 본격적으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 김대원 이장(가운데)이 조승모 전 이장(오른쪽)과 함께 마을 일을 의논하고 있다.
전촌1리는 122가구 219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성두마을, 고새마을, 구름마을, 거마장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성두마을은 신라시대 내성 아래 형성된 마을이다. 또 고새마을은 옛 성터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고성마을이라고 부르다가 음이 변해 고새마을이라고 불려왔다.
↑↑ 전촌1리 본마을인 성두마을 입구의 모습.
구름마을은 굴과 같은 큰 우물이 있다고 해서 굴마을이라고 불렀으나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발언하기 쉽도록 구름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을 운촌(雲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일제의 잔재라고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마장은 감포와 가까운 바닷가 인근의 야산에 있는 마을이다. 신라시대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망대로 군졸과 말을 주둔했던 곳이라고 한다.
↑↑ 전촌1리의 고새마을(왼쪽)과 구름마을(오른쪽)의 모습.
이 마을의 농사는 벼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콩과 보리도 함께 재배한다. 하지만 들이 좁아 소출이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이 마을 원로인 최해두(75)씨는 "과거 한 집안에 6~7명의 식구가 살 때에는 좁은 들판에서 나는 곡식으로 먹고 살기에 매우 빠듯했다"며 "하지만 산업화 이후 젊은이들이 돈을 벌러 대도시로 나가고 나니 비로소 식량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했다.
↑↑ 고새마을의 소나무밭.
식량이 모자라던 때 이 마을 사람들은 감포항에 나가서 어부들의 일손을 돕는 하루벌이를 하고 해산물을 사와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최씨는 "보릿고개가 되면 바닷가로 나가 일손을 돕고 품삯으로 해조류를 얻어오면 그것으로 죽을 쑤거나 반찬으로 먹었다"며 "지금은 귀한 음식이었지만 그때는 구하기 쉬웠는데 당시 해조류를 많이 먹은 까닭에 감포나 우리 마을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구름마을의 전형적인 농가모습.
감포항에서 잡은 수산물들은 대도시로 나아가기 위해 추령재를 넘어가야 했다.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신선할 때 추령재를 넘어 대도시에 내다 팔아야 했지만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에는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더러는 감포항 인근 마을에 헐값으로 팔아치워야 할 경우가 많았다. 전촌마을 사람들은 감포항의 해산물들, 그 가운데 고등어나 멸치 등을 싼 값에 사서 시래기를 넣고 죽을 쑤거나 반찬을 해 먹었다고 했다.
↑↑ 전촌1리의 최고령자 김부일 할아버지.
인근의 동해안 마을들과는 달리 전촌1리는 관광객의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는 마을이다. 따라서 다른 마을에 흔히 볼 수 있는 숙박업소나 카페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김대원 이장은 "비록 다른 바닷가 마을에 비해 가난하게 살았지만 농촌의 따뜻한 인심은 잘 간직된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전촌1리는 또 양반마을로 알려져 있다. 오래 전에는 경주최씨와 김해김씨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고 성두마을로 접어들면 글 읽는 소리가 맑고 또랑하게 들렸다고 한다.
김 이장은 해마다 줄어드는 인구로 고민이 많다고 했다. 김 이장은 "볍씨를 신청하는 농가와 수매하는 가구가 해마다 줄어드는 모습이 확연하게 느껴진다"며 "젊은이들이 아 마을로 돌아와 마을의 발전을 위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는 한 마을이 계속 유지되기 어렵지 않을까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 제2발전소 연료부 직원들이 자매마을 환경정화활동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김부일(96) 할아버지다. 김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14대째 살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는 군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겼고 해방 이후에는 좌우익 갈등으로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 다녔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배를 타며 이리저리 떠돌면서 어느 한쪽에도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안정이 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월성원전의 자매부서는 제2발전소 연료부다. 이동훈 대리는 "주민들이 온기와 품위가 넘치지만 발전 요소가 부족해 매우 안타까운 마을이 전촌1리"라며 "농촌마을이 새롭게 부각되고 이 마을의 장점이 크게 부각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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