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 신라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 - 문무왕의 강력한 제도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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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 작성일20-12-01 20:25본문
↑↑ 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경북신문=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 경북신문이 주최한 '2020 신라왕들의 축제'에서 열린 학술대회'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에 참가한 학자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신라왕들과 신라인의 창조적인 글로벌 의식과 혜안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세계를 적응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
5. 문무왕의 이상과 희구의 결과(1)
통일국가의 수성을 제대로 해내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현황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진단이 기본적 전제이다.
그래야만 모름지기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추출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제대로 가름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문무왕은 죽음에 직면하여 자신의 그런 입장을 유조(遺詔)의 형태로 남겼다. 유조 속에는 신라의 당면 현실 인식뿐만 아니라 장차 신라가 나아가야 할 지향에 대한 문무왕의 원대한 안목과 결단이 담겨져 있다.
사실 신라 국왕이 목소리를 남겨 어떤 이상과 방향을 갖고 있었던가를 직접 보여주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관련 기록은 너무도 희소하며, 약간 남아 전하더라도 지극히 단편적인 형식일 따름이다.
이를테면 진흥왕이 몇몇 비문에서 자신의 왕도정치 이상을 약간 드러낸 사례를 손꼽을 수 있다.
그밖에 국왕 자신의 심경이나 주검 처리, 혹은 사후 후계자 문제를 유언의 형태로 간략히 남긴 몇몇 사례가 겨우 찾아지는 정도이다.
그런 측면에서 국왕의 직접적인 목소리로서 신라국가가 장차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큰 윤곽을 그려 메시지를 강력하게 던진 것은 문무왕이 유일한 사례일 듯하다.
이는 문무왕이 현실 상황이나 그에 토대한 수성의 문제를 그만큼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수성을 위한 길을 모색하면서 실질적 방안을 마련해가던 도중에 죽음을 맞게 된 문무왕은 자신의 기획을 유조의 행태로 정리해서 남겼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와 관련한 결심을 과감하게 실행으로 옮겼음은 크게 주목해볼 사실이다.
문무왕이 현실을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수성에 고심하였던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조 자체는 그리 긴 편은 아니지만 신라국가의 향방을 가늠할 만한 엄청난 내용이 매우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종합하면 몇 가지 사항으로 정리된다.
첫째, 전쟁을 마무리 지으면서 신라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크게 제시한 문제이다.
문무왕은 모쪼록 전공(戰功) 포상을 균등하게 하며, 병기를 녹여 농기구로 만들고 힘써 농사를 짓도록 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며 요역을 줄여 인민들이 풍족하고 안전하게 잘 살아가도록 하는 기본 방향을 설정하였다. 앞으로 신라국가 정책의 근간과 방향의 대강(大綱)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둘째, 후계자의 승계 문제이다. 이미 재위 5년(665)째에 자신의 큰아들 정명(政明)을 태자로 책봉해둔 상태였다. 태자책봉제의 정착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결과였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정명으로 하여금 구전(柩前)에서 곧장 즉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종묘사직이란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다는 명분에 따른 것이지만 사실상 내부적으로 심상찮은 어떤 움직임이 일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태자 정명, 즉 신문왕이 즉위한 지 겨우 한 달째 되던 681년 8월 8일 자신의 장인인 김흠돌(金欽突) 중심의 유력 귀족들이 모반하였다가 복주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부터 다시 20일만인 8월 28일 병부령 군관(軍官)을 불고지죄로 처형하였다
이런 몇몇 사례는 이미 문무왕이 말년에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아직 중대 정권의 출범에 여러모로 반감을 가진 전통 귀족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문무왕은 전쟁이 마무리되면서도 이들이 말끔히 척결되지 않고 잔존한 사정을 심히 우려하였던 것이다.
아직 중대적 지배체제가 아직 제대로 안정적으로 구축되지 못한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셋째, 제반 제도적 정비와 연관된 문제이다. 문무왕은 자신의 시신에 대해 서국식(西國式)의 화장(火葬)을 하도록 유도한 사실이다.
이어서 장례를 검소하게 치루고 지방 대상으로 부과되는 각종 세금 가운데 불요불급한 것은 폐지하며 율령격식 가운데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불편함이 엿보이는 일체는 현실에 맞도록 고치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첫째인 국가 경영의 실현 방향과 맞물려 진행된 구체적인 제도의 개선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당연히 기왕과는 다른 새로운 제도의 도입도 적지 않게 포함되었을 터이다.
그런데 각별히 주목되는 사항은 서국식의 화장을 하도록 한 점이다. 여기에는 문무왕의 강력한 제도 개혁의 굳은 의지가 깃들어 있다.
자신의 유조가 결코 헛되지 않도록 강하게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신라에서 화장이란 장법(葬法)은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아직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던 장법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무왕은 예기치 않게 자신을 화장하도록 한 것은 대단한 결심에서 나온 조치로 여겨진다.
장법 자체가 굉장한 보수성을 지님이 일반적 양상이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화장하도록 유도한 것은 기존 보수성을 깨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내비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여타의 제도나 관행도 과감하게 정리함으로써 새로움을 추구해나가라는 강력한 주문으로 읽혀진다. 몸소 실천해 보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계속>
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 kua348@naver.com
5. 문무왕의 이상과 희구의 결과(1)
통일국가의 수성을 제대로 해내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현황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진단이 기본적 전제이다.
그래야만 모름지기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추출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제대로 가름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문무왕은 죽음에 직면하여 자신의 그런 입장을 유조(遺詔)의 형태로 남겼다. 유조 속에는 신라의 당면 현실 인식뿐만 아니라 장차 신라가 나아가야 할 지향에 대한 문무왕의 원대한 안목과 결단이 담겨져 있다.
사실 신라 국왕이 목소리를 남겨 어떤 이상과 방향을 갖고 있었던가를 직접 보여주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관련 기록은 너무도 희소하며, 약간 남아 전하더라도 지극히 단편적인 형식일 따름이다.
이를테면 진흥왕이 몇몇 비문에서 자신의 왕도정치 이상을 약간 드러낸 사례를 손꼽을 수 있다.
그밖에 국왕 자신의 심경이나 주검 처리, 혹은 사후 후계자 문제를 유언의 형태로 간략히 남긴 몇몇 사례가 겨우 찾아지는 정도이다.
그런 측면에서 국왕의 직접적인 목소리로서 신라국가가 장차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큰 윤곽을 그려 메시지를 강력하게 던진 것은 문무왕이 유일한 사례일 듯하다.
이는 문무왕이 현실 상황이나 그에 토대한 수성의 문제를 그만큼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수성을 위한 길을 모색하면서 실질적 방안을 마련해가던 도중에 죽음을 맞게 된 문무왕은 자신의 기획을 유조의 행태로 정리해서 남겼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와 관련한 결심을 과감하게 실행으로 옮겼음은 크게 주목해볼 사실이다.
문무왕이 현실을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수성에 고심하였던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조 자체는 그리 긴 편은 아니지만 신라국가의 향방을 가늠할 만한 엄청난 내용이 매우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종합하면 몇 가지 사항으로 정리된다.
첫째, 전쟁을 마무리 지으면서 신라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크게 제시한 문제이다.
문무왕은 모쪼록 전공(戰功) 포상을 균등하게 하며, 병기를 녹여 농기구로 만들고 힘써 농사를 짓도록 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며 요역을 줄여 인민들이 풍족하고 안전하게 잘 살아가도록 하는 기본 방향을 설정하였다. 앞으로 신라국가 정책의 근간과 방향의 대강(大綱)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둘째, 후계자의 승계 문제이다. 이미 재위 5년(665)째에 자신의 큰아들 정명(政明)을 태자로 책봉해둔 상태였다. 태자책봉제의 정착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결과였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정명으로 하여금 구전(柩前)에서 곧장 즉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종묘사직이란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다는 명분에 따른 것이지만 사실상 내부적으로 심상찮은 어떤 움직임이 일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태자 정명, 즉 신문왕이 즉위한 지 겨우 한 달째 되던 681년 8월 8일 자신의 장인인 김흠돌(金欽突) 중심의 유력 귀족들이 모반하였다가 복주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부터 다시 20일만인 8월 28일 병부령 군관(軍官)을 불고지죄로 처형하였다
이런 몇몇 사례는 이미 문무왕이 말년에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아직 중대 정권의 출범에 여러모로 반감을 가진 전통 귀족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문무왕은 전쟁이 마무리되면서도 이들이 말끔히 척결되지 않고 잔존한 사정을 심히 우려하였던 것이다.
아직 중대적 지배체제가 아직 제대로 안정적으로 구축되지 못한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셋째, 제반 제도적 정비와 연관된 문제이다. 문무왕은 자신의 시신에 대해 서국식(西國式)의 화장(火葬)을 하도록 유도한 사실이다.
이어서 장례를 검소하게 치루고 지방 대상으로 부과되는 각종 세금 가운데 불요불급한 것은 폐지하며 율령격식 가운데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불편함이 엿보이는 일체는 현실에 맞도록 고치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첫째인 국가 경영의 실현 방향과 맞물려 진행된 구체적인 제도의 개선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당연히 기왕과는 다른 새로운 제도의 도입도 적지 않게 포함되었을 터이다.
그런데 각별히 주목되는 사항은 서국식의 화장을 하도록 한 점이다. 여기에는 문무왕의 강력한 제도 개혁의 굳은 의지가 깃들어 있다.
자신의 유조가 결코 헛되지 않도록 강하게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신라에서 화장이란 장법(葬法)은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아직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던 장법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무왕은 예기치 않게 자신을 화장하도록 한 것은 대단한 결심에서 나온 조치로 여겨진다.
장법 자체가 굉장한 보수성을 지님이 일반적 양상이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화장하도록 유도한 것은 기존 보수성을 깨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내비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여타의 제도나 관행도 과감하게 정리함으로써 새로움을 추구해나가라는 강력한 주문으로 읽혀진다. 몸소 실천해 보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계속>
경북대 명예교수 주보돈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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