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특별기고] 초대 `경주특별시장`을 숭모하는 `왕자재(王子齋)`는 건립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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整風會長·교육학박사 김영호 작성일20-11-05 20:11본문
↑↑ 整風會長·교육학박사 김영호사람이 사세(斯世)에 태어나서 해야 할 과업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자아정체성을 견지하고 조상의 덕의를 숭모하며 사적을 현창하는 보본의 일이 무엇보다 먼저라 생각된다. 생업에 분망하여 자기의 출생에 관한 일차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조선(祖先)의 은공을 저버린 체 윤리·도덕적 강상을 바르게 지키지 못한다면 비록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 할지라도 어찌 온당한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각 도시마다 선정을 베푼 지방관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를 세우고, 향유들을 흠모하는 서원과 사당에 시 재원을 보조하여 수치하고 향사를 받들고 관리하는 것도 시민들의 성의를 담은 보본적 표상이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경주에 우뚝한 여러 왕릉과 무명의 대총을 깨끗하게 보전 관리하는 것 역시 같은 의미라 생각된다.
경주시 동방동 형제산 서록에 위치한 경주군 영분공의 묘소는 성손만이 아니라 시민들도 관심을 가져야 할 문화유산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영분공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요, 오늘날 서울특별시장 격인 '초대 경주특별시장'이기 때문이다.
공은 대보공(諱閼智)의 29세이고 경순왕과 왕비 죽방부인 박씨 사이에 태어난 3남1녀 중 마지막 왕자이며 휘는 명종(明鍾), 시호는 영분공(永芬公)으로, 고려 광종 11년에 경주군(慶州君)으로 봉군(封君)된 경주김씨의 관조(貫祖)이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왕으로서 박씨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비록 어려운 여건이었으나 신라를 9년간 통치하였다. 당시 주위의 호족들이 고려와 후백제에 투항하게 되어 국세가 매우 고약하여 나라를 통치하기가 힘들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백성에게 동원령을 내려 싸울 수도 있었으나, 이미 국운이 다함을 깨닫고 무고한 백성들의 간뇌로 도지(塗地)하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하여 고려 태조에게 양국을 하였던 것이다.
태자 일(鎰)공은 천년사직을 충신 의사와 더불어 힘을 합해 싸워보지 않고 양국한다는 것은 마당하지 않다고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개골산에 입산하여 일생을 마의초식으로 마치었다. 차자 황공은 부왕의 영정을 본떠 해인사에 들어가서 봉안하고, 부도(浮屠)가 되어 조석으로 배알하였다. 그러나 영분공은 부왕(父王)의 대의에 따라 30여리에 연하는 손국 행차를 배종하고 송도에서 부왕을 25년간 섬기며 충효를 다한 왕자였다.
공은 최초의 경주군(慶州君)으로 신라 유민을 다스렸다. 고려 태조가 경순왕을 상부로 삼는 고문에서 식읍 8000호를 주면서 대대로 계림에 살되 관은 왕작을 나누어 받는다 하였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의 호를 줄때 훈봉은 옛날과 같고 식읍은 모두 합쳐 1만호를 주면서 유사는 택일하여 책명하고 맡은 자는 시행하라 하였다.
신라의 멸망과 더불어 사적이 소실되어 영분공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서 안타까워 하다가,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 사이에 태어난 다섯 아드님 가운데 첫째인 대안군 휘 은열(殷說)공의 묘지석이 발견되어 거기의 기록에서 영분공의 서차(序次)가 발견 되었고, 1585년에 발행된 '경주김씨세보'에서 영분공의 묘소가 경주시 동방동 형제산 아래에 소재한다는 것을 발견하여 1996년 경주김씨영분공대종회 임원들이 공의 실묘(實墓)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封慶州君諡永芬公子孫仍貫慶州焉墓在兄弟山北今東方洞壬坐配夫人朴氏).
그래서 영분공 산소는 경주에 소재하는 유일한 신라왕자의 산소이며, 오늘날 가칭 '경주특별시장'에 해당하는 경주군(慶州君)의 묘소가 되었다. 묘소를 다행스럽게 찾아서,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여, 수치하고 묘비와 신도비를 세웠으나 재실만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의 재실이기 때문에 함부로 세울 수 없어서 성손들은 고민하고 있다.
경주에 소재하는 각 왕릉은 경주시에서 관리하여 모두가 깨끗하게 보전되어 오고 있으나, 신라의 마지막 왕자요, 초대 경주특별시장 격인 경주군(慶州君)의 묘역 관리는 성손만의 의무사항이 아니라 국가와 경주시에서도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초대 경주특별시장 격인 위상의 의미에서 볼 때 가칭 '왕자재(王子齋)'를 건립하여 관광명소로 성역화하는 것은 경주시의 아름다운 문화사업이라 할 것이다. 왕자재 건립에 경주시민의 관심과 경상북도와 경주시의 따뜻한 배려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整風會長·교육학박사 김영호 kua348@naver.com
각 도시마다 선정을 베푼 지방관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를 세우고, 향유들을 흠모하는 서원과 사당에 시 재원을 보조하여 수치하고 향사를 받들고 관리하는 것도 시민들의 성의를 담은 보본적 표상이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경주에 우뚝한 여러 왕릉과 무명의 대총을 깨끗하게 보전 관리하는 것 역시 같은 의미라 생각된다.
경주시 동방동 형제산 서록에 위치한 경주군 영분공의 묘소는 성손만이 아니라 시민들도 관심을 가져야 할 문화유산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영분공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요, 오늘날 서울특별시장 격인 '초대 경주특별시장'이기 때문이다.
공은 대보공(諱閼智)의 29세이고 경순왕과 왕비 죽방부인 박씨 사이에 태어난 3남1녀 중 마지막 왕자이며 휘는 명종(明鍾), 시호는 영분공(永芬公)으로, 고려 광종 11년에 경주군(慶州君)으로 봉군(封君)된 경주김씨의 관조(貫祖)이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왕으로서 박씨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비록 어려운 여건이었으나 신라를 9년간 통치하였다. 당시 주위의 호족들이 고려와 후백제에 투항하게 되어 국세가 매우 고약하여 나라를 통치하기가 힘들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백성에게 동원령을 내려 싸울 수도 있었으나, 이미 국운이 다함을 깨닫고 무고한 백성들의 간뇌로 도지(塗地)하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하여 고려 태조에게 양국을 하였던 것이다.
태자 일(鎰)공은 천년사직을 충신 의사와 더불어 힘을 합해 싸워보지 않고 양국한다는 것은 마당하지 않다고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개골산에 입산하여 일생을 마의초식으로 마치었다. 차자 황공은 부왕의 영정을 본떠 해인사에 들어가서 봉안하고, 부도(浮屠)가 되어 조석으로 배알하였다. 그러나 영분공은 부왕(父王)의 대의에 따라 30여리에 연하는 손국 행차를 배종하고 송도에서 부왕을 25년간 섬기며 충효를 다한 왕자였다.
공은 최초의 경주군(慶州君)으로 신라 유민을 다스렸다. 고려 태조가 경순왕을 상부로 삼는 고문에서 식읍 8000호를 주면서 대대로 계림에 살되 관은 왕작을 나누어 받는다 하였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의 호를 줄때 훈봉은 옛날과 같고 식읍은 모두 합쳐 1만호를 주면서 유사는 택일하여 책명하고 맡은 자는 시행하라 하였다.
신라의 멸망과 더불어 사적이 소실되어 영분공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서 안타까워 하다가,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 사이에 태어난 다섯 아드님 가운데 첫째인 대안군 휘 은열(殷說)공의 묘지석이 발견되어 거기의 기록에서 영분공의 서차(序次)가 발견 되었고, 1585년에 발행된 '경주김씨세보'에서 영분공의 묘소가 경주시 동방동 형제산 아래에 소재한다는 것을 발견하여 1996년 경주김씨영분공대종회 임원들이 공의 실묘(實墓)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封慶州君諡永芬公子孫仍貫慶州焉墓在兄弟山北今東方洞壬坐配夫人朴氏).
그래서 영분공 산소는 경주에 소재하는 유일한 신라왕자의 산소이며, 오늘날 가칭 '경주특별시장'에 해당하는 경주군(慶州君)의 묘소가 되었다. 묘소를 다행스럽게 찾아서,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여, 수치하고 묘비와 신도비를 세웠으나 재실만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의 재실이기 때문에 함부로 세울 수 없어서 성손들은 고민하고 있다.
경주에 소재하는 각 왕릉은 경주시에서 관리하여 모두가 깨끗하게 보전되어 오고 있으나, 신라의 마지막 왕자요, 초대 경주특별시장 격인 경주군(慶州君)의 묘역 관리는 성손만의 의무사항이 아니라 국가와 경주시에서도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초대 경주특별시장 격인 위상의 의미에서 볼 때 가칭 '왕자재(王子齋)'를 건립하여 관광명소로 성역화하는 것은 경주시의 아름다운 문화사업이라 할 것이다. 왕자재 건립에 경주시민의 관심과 경상북도와 경주시의 따뜻한 배려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整風會長·교육학박사 김영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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