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의 본동` 자부심 대단… 중심 위치한 마을 `감포 1리`
페이지 정보
김영식 작성일20-11-05 19:22본문
↑↑ 감포1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감포읍 감포(甘浦)1리는 감포읍을 대표하는 마을이다. 우체국, 파출소, 농협 등이 이 마을에 몰려 있고 과거에는 전매서와 감포읍 노인정이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감포의 본동'이라는 자부심이 크다.
↑↑ 김영노(오른쪽) 이장과 마을 원로 김영천(가운데)씨가 주민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241가구 429명의 주민이 살아가는 감포1리는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선원들이 많고 수산물을 파는 상인들, 횟집을 경영하는 주민들이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감포1리는 1937년 감포읍으로 승격될 당시 중심마을이었다. 인천광역시가 1937년 제물포읍으로 승격될 때 함께 읍이 됐다. 그러나 제물포읍은 현재 수도권 최대 도시인 인천광역시로 성장했지만 감포읍은 여전히 당시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이 고요하게 머물러 있다.
↑↑ 감포1리 앞바다의 등대.
감포읍으로 성장했을 당시 감포1리는 동경주에서 가장 잘 사는 마을이었다. 감포항이 개항했을 당시에는 감포1리만 있을 정도로 감포읍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 마을에 살았다.
↑↑ 감포1리의 한적한 골목길.
마을 원로인 김영천(81)씨는 "옛날 감포에서는 정치망 어업과 기선저인망 어업을 하면서 풍어기를 만끽하던 때가 있었다"며 "만선으로 회항하는 고깃배에서 내려진 수산물들은 관해령을 넘어 경주나 대구, 울산으로 팔려 나갔는데 그때 주민들은 모두 잘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1960년대까지 관해령의 도로가 부실해 비가 오거나 길이 막히면 등짐으로 수산물을 운반하는 어려움도 겪었다"며 "어선들이 한 번 출항하면 30여명의 선원들이 필요했는데 대부분 마을 사람들을 고용했기 때문에 밥 먹고 사는 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감포1리에서 가장 번화한 회센터 거리.
또 "정치망으로 잡히는 방어는 워낙 인기가 좋아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던 때도 있었다"고 자랑했다.
일제강점기 때 감포1리의 학생들은 대부분 전촌초등학교를 다녔다. 감포에도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해방 전까지는 일본인 자녀들이 다녔기 때문에 멀지만 인근의 전촌리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 감포1리는 번창했다. 지금은 400여명의 인구에 불과하지만 1970~1980년대까지는 그보다 두배에 가까운 700~800여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 감포1리의 최고령자 김홍선 할머니.
김영노 이장은 "감포1리에는 농토가 없어서 주민들은 바다에 모든 생명을 걸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농사를 지을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후배지조차 넉넉하지 않아 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는 처지다. 채전밭을 가꿀 정도의 땅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감포1리는 감포읍의 다른 마을보다 면적이 가장 좁은 마을이다.
김 이장은 "감포 전체 인구가 한때는 2만명이 넘었는데 현재에는 약 5000여명 정도로 줄어들 정도로 살기가 팍팍하다"며 "하지만 전통적인 어촌마을의 형태를 잘 간직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 제1발전소 구조기술부가 자매마을 김영노 이장에게 수해 위문품을 전달하고 있다.
감포1리의 최고령자는 김홍선(92) 할머니다. 김 할머니는 18살에 인근 포항시 장기면에서 시집을 와 지금까지 감포1리에서 살고 있다. 김 할머니는 "할아버지는 평생 이 마을에서 선원으로 살다가 갔다"며 "할아버지가 고기를 잡아오면 감포 시장에 나가 팔아서 생활비를 보탰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가자미, 붕장어 등 생선을 시장에 내놓으면 워낙 인기가 많아 오전 나절에 다 팔렸다"며 "고기잡이로 살아가는 이 마을 사람들은 해방 이후 크게 배고픈 일은 없을 정도로 평범하게 살았다"고 회상했다.
정경순(91) 할머니는 "젊은 시절 이 마을 해녀들이 건져 올린 미역을 대구, 울산으로 팔아서 돈도 많이 벌었다"며 "그만큼 감포의 미역이 품질이 좋아 미리 주문을 받아 물량을 댈 정도였다"고 말했다.
월성원전의 자매부서는 제1발전소 구조기술부다. 배효창 과장은 "감포항의 산 역사인 감포1리의 주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하고 자립심도 강하다"며 "개항한 지 100년이 가까운 감포항을 지켜낸 주민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상생하는 방안을 찾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경북신문=김영식기자] 감포읍 감포(甘浦)1리는 감포읍을 대표하는 마을이다. 우체국, 파출소, 농협 등이 이 마을에 몰려 있고 과거에는 전매서와 감포읍 노인정이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감포의 본동'이라는 자부심이 크다.
↑↑ 김영노(오른쪽) 이장과 마을 원로 김영천(가운데)씨가 주민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241가구 429명의 주민이 살아가는 감포1리는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선원들이 많고 수산물을 파는 상인들, 횟집을 경영하는 주민들이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감포1리는 1937년 감포읍으로 승격될 당시 중심마을이었다. 인천광역시가 1937년 제물포읍으로 승격될 때 함께 읍이 됐다. 그러나 제물포읍은 현재 수도권 최대 도시인 인천광역시로 성장했지만 감포읍은 여전히 당시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이 고요하게 머물러 있다.
↑↑ 감포1리 앞바다의 등대.
감포읍으로 성장했을 당시 감포1리는 동경주에서 가장 잘 사는 마을이었다. 감포항이 개항했을 당시에는 감포1리만 있을 정도로 감포읍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 마을에 살았다.
↑↑ 감포1리의 한적한 골목길.
마을 원로인 김영천(81)씨는 "옛날 감포에서는 정치망 어업과 기선저인망 어업을 하면서 풍어기를 만끽하던 때가 있었다"며 "만선으로 회항하는 고깃배에서 내려진 수산물들은 관해령을 넘어 경주나 대구, 울산으로 팔려 나갔는데 그때 주민들은 모두 잘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1960년대까지 관해령의 도로가 부실해 비가 오거나 길이 막히면 등짐으로 수산물을 운반하는 어려움도 겪었다"며 "어선들이 한 번 출항하면 30여명의 선원들이 필요했는데 대부분 마을 사람들을 고용했기 때문에 밥 먹고 사는 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감포1리에서 가장 번화한 회센터 거리.
또 "정치망으로 잡히는 방어는 워낙 인기가 좋아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던 때도 있었다"고 자랑했다.
일제강점기 때 감포1리의 학생들은 대부분 전촌초등학교를 다녔다. 감포에도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해방 전까지는 일본인 자녀들이 다녔기 때문에 멀지만 인근의 전촌리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 감포1리는 번창했다. 지금은 400여명의 인구에 불과하지만 1970~1980년대까지는 그보다 두배에 가까운 700~800여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 감포1리의 최고령자 김홍선 할머니.
김영노 이장은 "감포1리에는 농토가 없어서 주민들은 바다에 모든 생명을 걸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농사를 지을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후배지조차 넉넉하지 않아 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는 처지다. 채전밭을 가꿀 정도의 땅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감포1리는 감포읍의 다른 마을보다 면적이 가장 좁은 마을이다.
김 이장은 "감포 전체 인구가 한때는 2만명이 넘었는데 현재에는 약 5000여명 정도로 줄어들 정도로 살기가 팍팍하다"며 "하지만 전통적인 어촌마을의 형태를 잘 간직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 제1발전소 구조기술부가 자매마을 김영노 이장에게 수해 위문품을 전달하고 있다.
감포1리의 최고령자는 김홍선(92) 할머니다. 김 할머니는 18살에 인근 포항시 장기면에서 시집을 와 지금까지 감포1리에서 살고 있다. 김 할머니는 "할아버지는 평생 이 마을에서 선원으로 살다가 갔다"며 "할아버지가 고기를 잡아오면 감포 시장에 나가 팔아서 생활비를 보탰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가자미, 붕장어 등 생선을 시장에 내놓으면 워낙 인기가 많아 오전 나절에 다 팔렸다"며 "고기잡이로 살아가는 이 마을 사람들은 해방 이후 크게 배고픈 일은 없을 정도로 평범하게 살았다"고 회상했다.
정경순(91) 할머니는 "젊은 시절 이 마을 해녀들이 건져 올린 미역을 대구, 울산으로 팔아서 돈도 많이 벌었다"며 "그만큼 감포의 미역이 품질이 좋아 미리 주문을 받아 물량을 댈 정도였다"고 말했다.
월성원전의 자매부서는 제1발전소 구조기술부다. 배효창 과장은 "감포항의 산 역사인 감포1리의 주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하고 자립심도 강하다"며 "개항한 지 100년이 가까운 감포항을 지켜낸 주민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상생하는 방안을 찾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