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북 새마을사업의 첫 주자, 부촌으로 손꼽혔던 `와읍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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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작성일20-10-18 18:52본문
↑↑ 와읍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양북면 와읍리(臥邑里)는 냇가 사발바위에서 동산으로 이어지는 바위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능곡, 굴암, 중기, 연당, 공장마을, 새마을 등 6개 자연마을로 구성된 와읍리는 114가구에 22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와읍리의 중심마을인 능곡은 우룡산 아래의 언덕 위에 높게 형성돼 있다. 조선시대 임씨 성을 가진 이가 마을을 개척해 구릉 위의 마을이라고 해서 능동(陵洞)이라고 했다가 어느날 꿈에 마을 위를 흐르는 골짜기가 있고 산세가 골짜기를 향해 흘러 이 꿈은 필시 자손이 귀하게 될 징조라고 여겨 골짜기를 만든다는 뜻의 능곡(陵谷)이라고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 와읍리의 고가 화음정.
원래 임씨와 밀양박씨가 거주하던 능곡에는 약 250년 전 전주이씨 진남군파의 이일형이 밀양박씨 집안에 장가들어 정착하면서 훗날 전주이씨 진남군파의 집성촌으로 바뀌었다. 진남군은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의 여섯 번째 왕자였으며 이일형은 진남군의 14세손이다. 그래서 능곡마을에는 진남군을 배향하는 사당인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 와읍리의 원로 이재병(오늘쪽에서 세번째)씨가 마을 주민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굴암마을은 옛날 마을 서쪽에 큰 바위가 있어 굴바위라고 불렀다. 그뒤 풍화작용과 홍수로 말미암아 굴바위는 없어졌으며 교통이 편리해 과수와 양돈이 발달한 때도 있었다. 또 이 마을의 흙에 점토가 많아 기와공장이 있었고 양북 뿐만아니라 감포, 양남의 기와집은 대부분 이 공장의 기와를 썼다고 전해진다.
와읍리의 최고령자인 이방희(94) 할아버지는 이일형의 후손으로 양북면장을 지냈다. 이 할아버지는 "와읍리는 과거 양북면에서 부촌으로 꼽힐 정도로 먹고 사는 일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인근의 용동, 안동, 입천리에 와읍리 사람들의 토지가 많았다"며 "1970년대까지는 약 500명 정도의 주민이 살 정도로 번창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 전주이씨 진남군파의 파조 이일형을 모신 상덕사.
와읍리가 이처럼 먹고 살기에 어렵지 않은 마을이 된 것은 전주이씨의 가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만든 규조토 광산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장마을에 지금도 그 흔적의 일부가 남아 있는 규조토 광산은 군수물자를 생산하던 곳으로 이곳의 일꾼은 대부분 와읍리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징용으로 일본이나 먼 타국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와읍리 사람들은 규조토 광산이 있는 덕분에 모두 이곳으로 징용 당해 다행이기도 했다.
↑↑ 와읍리의 최고령자 이방희 할아버지.
이 마을 원로인 이재현(89)씨는 "규조토 광산에 살던 일본인들은 이층집을 짓고 호화롭게 살았다"며 "그곳의 일본인들이 가끔 영화를 상영해 마을사람들이 영화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갔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술회했다.
와읍리는 양복면에서 새마을사업이 가장 먼저 실시된 마을이다. 당시 면장이었던 이방희 할아버지에게 정부가 "면장의 고향마을부터 시범적으로 새마을운동을 해보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좁은 논둑길을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넓혔고 그때부터 마을 주민이 훨씬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됐다.
↑↑ 일제강점기 군수물자로 사용된 규조토를 채굴하던 광산마을 모습.
와읍리 입구에는 '일요시장'이라는 독특한 시장이 매주 일요일마다 열린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던 와읍교가 1945년 홍수에 떠내려가고 난 뒤 당분간 굴암마을로 우회하는 길을 사용하다가 1979년 콘크리트 다리가 만들어졌고 이 다리가 다시 붕괴돼 1995년 또다시 튼튼한 다리를 만들었을 때 공터가 생기고 그 공터에 시장이 들어섰다. 이 시장에는 인근의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과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 약초, 과일 등을 팔고 동해안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능곡마을은 7년 전 전원마을로 지정됐다. 그 후 전선지중화 사업으로 모든 전신주가 사라졌다. 이 마을에는 화음정이라는 약 150년 된 고가가 있고 문화재로 지정돼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 제3발전소 방사선안전부 직원들이 와읍리를 찾았다.
월성원전의 자매부서는 제3발전소 방사선안전부다. 이수진 과장은 "양북면에서 가장 전통적 문화가 잘 남아 있는 와읍리를 찾으면 직원들을 항상 다정하고 반갑게 맞아주신다"며 "양북의 역사를 이어가는 와읍리 발전을 위해 서로 소통하면서 힘껏 돕겠다"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양북면 와읍리(臥邑里)는 냇가 사발바위에서 동산으로 이어지는 바위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능곡, 굴암, 중기, 연당, 공장마을, 새마을 등 6개 자연마을로 구성된 와읍리는 114가구에 22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와읍리의 중심마을인 능곡은 우룡산 아래의 언덕 위에 높게 형성돼 있다. 조선시대 임씨 성을 가진 이가 마을을 개척해 구릉 위의 마을이라고 해서 능동(陵洞)이라고 했다가 어느날 꿈에 마을 위를 흐르는 골짜기가 있고 산세가 골짜기를 향해 흘러 이 꿈은 필시 자손이 귀하게 될 징조라고 여겨 골짜기를 만든다는 뜻의 능곡(陵谷)이라고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 와읍리의 고가 화음정.
원래 임씨와 밀양박씨가 거주하던 능곡에는 약 250년 전 전주이씨 진남군파의 이일형이 밀양박씨 집안에 장가들어 정착하면서 훗날 전주이씨 진남군파의 집성촌으로 바뀌었다. 진남군은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의 여섯 번째 왕자였으며 이일형은 진남군의 14세손이다. 그래서 능곡마을에는 진남군을 배향하는 사당인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 와읍리의 원로 이재병(오늘쪽에서 세번째)씨가 마을 주민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굴암마을은 옛날 마을 서쪽에 큰 바위가 있어 굴바위라고 불렀다. 그뒤 풍화작용과 홍수로 말미암아 굴바위는 없어졌으며 교통이 편리해 과수와 양돈이 발달한 때도 있었다. 또 이 마을의 흙에 점토가 많아 기와공장이 있었고 양북 뿐만아니라 감포, 양남의 기와집은 대부분 이 공장의 기와를 썼다고 전해진다.
와읍리의 최고령자인 이방희(94) 할아버지는 이일형의 후손으로 양북면장을 지냈다. 이 할아버지는 "와읍리는 과거 양북면에서 부촌으로 꼽힐 정도로 먹고 사는 일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인근의 용동, 안동, 입천리에 와읍리 사람들의 토지가 많았다"며 "1970년대까지는 약 500명 정도의 주민이 살 정도로 번창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 전주이씨 진남군파의 파조 이일형을 모신 상덕사.
와읍리가 이처럼 먹고 살기에 어렵지 않은 마을이 된 것은 전주이씨의 가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만든 규조토 광산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장마을에 지금도 그 흔적의 일부가 남아 있는 규조토 광산은 군수물자를 생산하던 곳으로 이곳의 일꾼은 대부분 와읍리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징용으로 일본이나 먼 타국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와읍리 사람들은 규조토 광산이 있는 덕분에 모두 이곳으로 징용 당해 다행이기도 했다.
↑↑ 와읍리의 최고령자 이방희 할아버지.
이 마을 원로인 이재현(89)씨는 "규조토 광산에 살던 일본인들은 이층집을 짓고 호화롭게 살았다"며 "그곳의 일본인들이 가끔 영화를 상영해 마을사람들이 영화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갔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술회했다.
와읍리는 양복면에서 새마을사업이 가장 먼저 실시된 마을이다. 당시 면장이었던 이방희 할아버지에게 정부가 "면장의 고향마을부터 시범적으로 새마을운동을 해보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좁은 논둑길을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넓혔고 그때부터 마을 주민이 훨씬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됐다.
↑↑ 일제강점기 군수물자로 사용된 규조토를 채굴하던 광산마을 모습.
와읍리 입구에는 '일요시장'이라는 독특한 시장이 매주 일요일마다 열린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던 와읍교가 1945년 홍수에 떠내려가고 난 뒤 당분간 굴암마을로 우회하는 길을 사용하다가 1979년 콘크리트 다리가 만들어졌고 이 다리가 다시 붕괴돼 1995년 또다시 튼튼한 다리를 만들었을 때 공터가 생기고 그 공터에 시장이 들어섰다. 이 시장에는 인근의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과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 약초, 과일 등을 팔고 동해안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능곡마을은 7년 전 전원마을로 지정됐다. 그 후 전선지중화 사업으로 모든 전신주가 사라졌다. 이 마을에는 화음정이라는 약 150년 된 고가가 있고 문화재로 지정돼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 제3발전소 방사선안전부 직원들이 와읍리를 찾았다.
월성원전의 자매부서는 제3발전소 방사선안전부다. 이수진 과장은 "양북면에서 가장 전통적 문화가 잘 남아 있는 와읍리를 찾으면 직원들을 항상 다정하고 반갑게 맞아주신다"며 "양북의 역사를 이어가는 와읍리 발전을 위해 서로 소통하면서 힘껏 돕겠다"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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