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 전에도 `情報報告`는 철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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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 작성일17-01-05 19:49본문
정부 등 공조직은 '정보보고(情報報告)'가 생명이다. 특히 보고서는 사실관계나 현안사항을 정확하게 작성해야 만이 의사결정권자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기밀서류다. 특히 국정운영과 권력층 관련 비리 정보는 관계기관원이 세심한 정보수집 활동을 해야 만이 고급 보고서 또는 양질의 보고서가 생산될 수 있다.
최순실 사태에서 보았듯이 청와대를 향한 국가 기관의 '보고서(報告書)'가 부실하거나,아니면 허위,또는 권력자 입맛과 취향에 맞게 작성됐기에 오늘에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물며, 1500년 전 신라시대 지방관료가 중앙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인 '목간유물(木簡遺物)'을 보면,현 정부와 보다 더 양질이고 우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신라 5~6세기 '정보보고' 즉 하찰목간(荷札木簡·조세의 물품에 붙여진 나무명패목간) 등 308점이 출토됐다. 신라시대 목간은 경주 월지, 월성, 동궁 등에서도 출토되기도 했지만,그 문자 내용은 일반적인 사항이었다.
지난 2012년 백제 사비성터에서 구구단 목간이 출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성산산성에 출토된 목간에는 신라의 지방체제와 조세체계 등을 알 수 있는 보고서 형식이고, 이 사례는 최초다. 당시만 해도 종이가 보편화돼지 않아 목간 또는 죽간(竹簡)이 종이 대신으로 쓰였다.
출토된 목간은 4면으로 크기는 길이 34.4cm, 두께 1.0~1.8cm에 모두 56 글자가 쓰여 있다. 1면 내용은 "3월에 진내멸(眞乃滅:지명) 촌주(村主)가 두려워하며 삼가 아룁니다"로 시작하고 있다. 4면은 "제가 어리석었음을 아룁니다"로 보고를 마친다. 이것은 진내멸(眞乃滅) 지방의 촌주(村主)가 성(城)에 있는 상급자인 '대사(大舍)' 관등의 관리에게 잘못된 법 집행을 두려워하여 이실직고(以實直告)한 보고다.
특히 이 촌주는 '급벌척'(及伐尺) 관등의 '이타리(伊他罹)'라는 사람이 60일간 일을 해야 하는데, 30일만 하고 돌아갔다고 보고했다. 이 내용은 당시 관리의 직무태만에 대한 감찰(監察)보고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문서 양식은 6세기 중반께 신라 지방사회까지 '문서행정'이 구체적으로 시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신라는 율령을 통한 엄격한 지방지배체제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 목간에는 당시 신라 지방민을 대상으로 한 관등체계인 17등급도 확인됐다.그래서 이 자료는 한국의 고대 목간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1500년 전 신라 때 공직자들의 비행이나 행정집행에 대한 보고가 체계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현 시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볼 부분이다.
신라 관료들의 보고서 작성이나 정보보고 체계,그리고 공직기강이 철저했기에 신라가 천년을 유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박근혜 정부의 국정 관련 보고서는 신라 하찰죽간보다 질이나 양적인 면에서 너무 부실했다고 할 수 있다.
경북신문 kua348@naver.com
최순실 사태에서 보았듯이 청와대를 향한 국가 기관의 '보고서(報告書)'가 부실하거나,아니면 허위,또는 권력자 입맛과 취향에 맞게 작성됐기에 오늘에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물며, 1500년 전 신라시대 지방관료가 중앙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인 '목간유물(木簡遺物)'을 보면,현 정부와 보다 더 양질이고 우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신라 5~6세기 '정보보고' 즉 하찰목간(荷札木簡·조세의 물품에 붙여진 나무명패목간) 등 308점이 출토됐다. 신라시대 목간은 경주 월지, 월성, 동궁 등에서도 출토되기도 했지만,그 문자 내용은 일반적인 사항이었다.
지난 2012년 백제 사비성터에서 구구단 목간이 출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성산산성에 출토된 목간에는 신라의 지방체제와 조세체계 등을 알 수 있는 보고서 형식이고, 이 사례는 최초다. 당시만 해도 종이가 보편화돼지 않아 목간 또는 죽간(竹簡)이 종이 대신으로 쓰였다.
출토된 목간은 4면으로 크기는 길이 34.4cm, 두께 1.0~1.8cm에 모두 56 글자가 쓰여 있다. 1면 내용은 "3월에 진내멸(眞乃滅:지명) 촌주(村主)가 두려워하며 삼가 아룁니다"로 시작하고 있다. 4면은 "제가 어리석었음을 아룁니다"로 보고를 마친다. 이것은 진내멸(眞乃滅) 지방의 촌주(村主)가 성(城)에 있는 상급자인 '대사(大舍)' 관등의 관리에게 잘못된 법 집행을 두려워하여 이실직고(以實直告)한 보고다.
특히 이 촌주는 '급벌척'(及伐尺) 관등의 '이타리(伊他罹)'라는 사람이 60일간 일을 해야 하는데, 30일만 하고 돌아갔다고 보고했다. 이 내용은 당시 관리의 직무태만에 대한 감찰(監察)보고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문서 양식은 6세기 중반께 신라 지방사회까지 '문서행정'이 구체적으로 시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신라는 율령을 통한 엄격한 지방지배체제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 목간에는 당시 신라 지방민을 대상으로 한 관등체계인 17등급도 확인됐다.그래서 이 자료는 한국의 고대 목간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1500년 전 신라 때 공직자들의 비행이나 행정집행에 대한 보고가 체계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현 시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볼 부분이다.
신라 관료들의 보고서 작성이나 정보보고 체계,그리고 공직기강이 철저했기에 신라가 천년을 유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박근혜 정부의 국정 관련 보고서는 신라 하찰죽간보다 질이나 양적인 면에서 너무 부실했다고 할 수 있다.
경북신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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